두 달쯤 지나 몰아봤다. 황당하지만 재미있었다. 가슴에 꽂힌 칼을 빼줄 도깨비 신부를 찾아 천 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한 많은 도깨비 이야기나 조선시대 처음 만나 몇 백 년을 달달하게 이어가는 사람과 인어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자라고 흥청거리고 성숙해 어느 덧 인생의 가을을 목전에 둔 자의 피로와 고갈을 채워주는 듯한 낯선 신선함이었다. 더욱이 이 드라마 주인공들의 비현실적이고 압도적인 외모를 더하면 어릴 적 동화나 만화 속 인물들이 현실로 튀어 나와 사랑스러우면서도 원숙한 교태를 뽐내는 것 같았다.

주변의 반응을 물어보면 극명하게 엇갈렸다. 내 또래의 남성들에게 이 드라마들 얘기를 하면 “아직도 그런 것 보고 다니느냐”며 드라마 자체를 본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뉴스와 시사, 역사, 다큐 등 가장 현실적인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이라 그럴 수도 있겠고, 보통 남자의 한 인생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고 ‘빨리 올라가기’ 혹은 ‘오래 버티기’만 생각한다는 40대 남성들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 숱한 유혹과 잡념에 미혹되지 않아야 하는 불혹(不惑)의 나이니깐. 지켜야할 것이 많은 나이니깐.

그러나 3, 40대 여성들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특히,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에 대한 흠모는 거의 경의(敬意) 수준이었고 매번 눈빛이 달콤하게 흔들렸다. 결혼 유무에 상관없이 아직 한 번 쯤 더 남아 있을 지도 모르는 내 마지막 사랑의 자리에 그 남자 주인공들을 발칙하게 대입시키는 것 같았고, 심지어 기자가 지난 겨울 내내 입고 다닌 낡은 롱코트에도 찬사를 보내줬다.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들이 롱코트를 잘 입고 다녔다는 이유에서인 것 같은데, 솔직히 그 주인공들이 입었던 롱코트를 기자가 그대로 입으면 그저 담요를 덮어 쓴 것 같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벌써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 전반에 복고와 판타지 열풍이 뚜렷하다. 그 시절 그 사람, 그것들 ‘추억하기’나 ‘찾으러 가기’ 혹은 ‘그땐 그랬지’ 류의 애잔함은 말 그대로 돈이 됐다. 아득히 두고 온 그 세계의 첫 사랑, 이 정도가 아니라 가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느낌 같이 지난 어떤 한 세월 전체를 숟가락으로 통째로 퍼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위에 어마무시하게 흩뿌린 것 같은 지독한 그리움 속에 우리 모두를 살게 했다. 또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시공의 경계를 없애고, 전생과 이생을 마음 놓고 오가며 사랑과 복수로 수없이 얽히고설키는 판타지는 촉이 좋은 드라마와 영화계에 모처럼 찾아온 효자 소재거리가 됐다. 20년 전 사람과 무전기 하나로 통화해 살인사건을 해결하다니, 이런 기발하고 야무진 상상과 예고 없이 쉼 없이 부대낀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패션처럼 돌고 돌아 어떤 시점에 잠깐 머문 유행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들의 불안과 도피 심리 같은 것도 분명히 반영된 듯하다. 단군 이래 최악의 실업대란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정말 먹고 살기 힘든 살림살이, 여기에 늙은 작부의 엉덩이짓 같이 추잡스러운 사기꾼 아줌마에게 무지한 대통령이 홀려 탄핵까지 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는 국민들을 지금 이 현실에만 묶어놓고, 가둬두고 살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안팎에서 겪고 있는 총체적 위기는 조만간 대통령 하나 잘 뽑았다고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데 우리 국민들의 처절한 암울함과 참담함이 있다.

사사롭게는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간절한 동경도 있었을 것이다. 필멸(必滅)의 존재가 불멸(不滅)을 염원하며 애타게 불러온 가장 그럴싸한 위로일수도 있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세상의 모든 생명 가운데 경험해 보지 않고서도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에, 사후(死後)에 저런 세상을 막연히 꿈꿀 수 있었을 것이고, 시류(時流)에 곁눈질 하며 대부분 졸속으로 늙어갈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삶에서 지금껏 살아온 인생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자꾸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29살의 성철스님은 마침내 견성을 이뤘다. 피붙이를 두고 영원한 자유를 찾아 출가해 무자 화두를 들고 구도의 여정으로 수행한 지 4년 만에 자기 마음 이외에 불법이 없고 자기 마음 이외에 부처가 없다는 ‘부사의해탈경계(不思義解脫境界)’를 성취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쉽사리 성철스님이 될 수 없고 저 경지에 오를 수 없다. 성철스님이야 ‘청상과부가 외동아들이 벼락을 맞아 죽어도 눈썹하나 까닥이지 않을 각오’로 화두를 잡았지만 우리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쳐진다. 우리는 그만큼 내려놓고 버리고 비울 수 없다. 그래서 도깨비가 소중하다. 흐르는 강물과 같은 인생길, 그 굽이굽이 요소요소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은 그저 스쳐가는 바람일 뿐, 종극의 막다른 골목에서 모든 인간은 홀로 남아 도깨비의 표현대로라면 완전한 무(無)로 소멸된다. 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허망함과 유한성에 도깨비는 시리도록 절절한 위안을 준다. 혹여 다음 세상이 정말 있을지 모른다고. 아니,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가자고. 도깨비가 유치했다 말하지 말라. 당신이 사람이라면. [사회부장] [2017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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