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9일. 사회부 막내가 이른바 ‘이태원 살인사건’의 진범, 패터슨에게 징역 20년형이 선고됐다고 보고했다. 솜털이 뽀송뽀송했던 17세 소년은 온 얼굴에 수염이 만개한 36세 젊은이로 겁 없이 자랐지만 온갖 표정을 가증스럽게 연출하며 여전히 억울해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기자의 인생에 집요하게 인연의 고리를 걸고 있다. 1997년 4월 3일 사건 당일 밤, 기자는 용산 KATUSA(카투사)로 복무하며 사건 현장에 있었다. 어느덧 Corporal(코퍼럴, 상병)을 단 지도 넉 달째, 미군 음식이라면 냄새만으로도 역겨워 몸부림치던 시절, 퇴근(미군 군복무는 일반 직장처럼 출퇴근 개념이다)만 하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부대 밖으로 나가 한국 음식을 사먹었고, 이후 밤늦게까지 부대 앞인 이태원 나이트와 클럽, 바 등을 전전했다. 그리고 습관처럼 지금은 사라진 그 곳 ‘버거킹’ 햄버거 가게에서 출출해진 배를 채운 뒤 부대로 복귀했는데, 그 날 거기서 패터슨에게 살해당한 홍익대 휴학생, 조중필 씨를 본 듯하다. 취기에 먼발치에서 본 너무도 평범하고 왜소한 보통 대학생 모습이어서 전혀 신경을 안 썼는데, 나중에 알려진 조 씨의 차림새나 정황을 봤을 때 기자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이 맞는 것 같다. 그날 기자는 일행과 햄버거를 사먹고 아무 일도 없는 듯 부대로 복귀해 평소처럼 잠들었는데, 잠든 지 얼마 안 돼 저 멀리 MP(Military Police, 미군 헌병)의 사이렌과 부산스러움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또 미군들이 싸움질을 하는 구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다음날 아침, 아직도 잠이 덜 깬 채 들은 얘기는 섬뜩한 정도로 충격이었다. 그러다가 한동안 부대원들 사이에서 쉼 없이 회자되긴 했지만 이내 사라졌다. 제대를 하고 우리 모두는 당연한 듯 이 일을 잊어버렸다. 현장 기자로서 가장 바쁘게 살던 2009년 9월, 약속시간을 때우기가 애매해 우연히 친구 녀석과 같이 본 영화가 장근석 주연의 ‘이태원 살인사건’이었다. 처음에는 B급 호러물인가 싶었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내면 저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기자의 서늘한 기억을 깨우는 것이었다. 솔직히 기자는 12년 전 당시 사건의 전말을 그 영화를 보고 정확하게 알았다.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하루 종일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다시 7년 후, 패터슨이 공소시효 며칠을 남기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극적으로 송환돼 법정에 서고 조 씨 어머니의 피맺힌 절규 속에 엄혹한 법의 심판을 받았다. 19년 전 그날, 조 씨가 우리 일행과 그 어떤 작은 인연으로라도 엮였다면 그런 참담한 변을 당하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 이 보다도 더 쉽게, 그냥 우리 일행이 단지 조 씨의 자리 근처에 자리만 잡았어도 저 파렴치한 살인마와 그의 동조자가 한국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조 씨를 업신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패터슨에 대한 최종 선고 기사를 승인하면서 내내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5월 어느 날. 죽기 전에 한 번은 봐야 할 여자동창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남녀공학으로 나온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낯설고 생소했던 80년 대 후반, 그 아이는 우리 남학생들 모두의 로망이었다. 청순가련의 이미지를 긴 생머리가 아닌 오직 단발로 일갈하며, 한 얼굴에 선한 고혹의 눈망울과 천상의 황금 미소를 동시에 품을 수 있었던 아이. 그녀가 반바지를 입고 체육을 하는 날이면, 탁월하고 우월한 기럭지로 온 운동장을 누비는 그녀를 보기 위해 남학생들은 창문가로 창문이 깨질 때까지 모여들었다. 물론 기자에게도 선망의 대상이고 궁극적인 지향이었지만 학창 시절 내내 기자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크류바를 사먹기 위해 학교 매점에 갔을 때 기자 앞에 한두 번 서있었고, 11번 버스를 서너 번 같이 탔으며, 당시 기자가 살던 아파트 상가 떡집에서 엄마와 같이 본 것이 다였다. 기자는 유명한 그녀를 알았지만 그녀는 무명의 기자를 몰랐기에 별스러운 지분거림조차 한 번 없었다. 그렇게 무관하게 헤어진 지 30년이 다 돼 어느 푸르디 푸른 5월, 소담한 우리들의 동창회에 그녀가 나온다는 소식에 아직도 그녀를 자기만의 무엇으로 품고 있는 남정네들은 술렁거렸다. 기자도 먼지 속에 파묻힌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꺼내봤다. 이 주옥같이 하얀 아이가 벌써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재혼까지 했구나... 억척생활녀로 벌써 장성한 아이가 있다지... 평생 화장실도 가지 않고 유리로 지은 집에서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았던 그녀의 고단한 삶의 부침과 쓸쓸한 인생역정이 가슴 아팠다. 기자는 그 동창회에 나가지 않았다. 늙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수다스럽고 무모한 아줌마의 아우라를 그녀에게서 발견할까봐 두려웠다. 환상은 시절이다. 환상이 깨지는 것은 시절이 깨지는 것이다. 그 시절의 그녀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나이 40을 수월찮게 넘기니 홀로 분명해지는 게 있다. 첫 사랑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다. 아니 최소한 여자들은 첫 사랑을 얘기하지 않는다. 기자는 여태껏 첫 사랑을 떠들고 다니는 여자들을 본 적이 없다. 여자들이 첫 사랑의 소중한 환상을 깨기 싫어 영원히 함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직 내 눈 앞의 지금 이 사랑에 충실하기 위해 지난 모든 사랑을 애써 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들은 아직도 누군가의 첫 사랑이라는 것이다. 죽기 전에 한 번은 봐야 할 여자동창이 있었다. 그녀를 보지 못한 것을 몹시도 후회하지만 이 후회의 무게가 기꺼이 봐서 얻는 후회의 무게 보다는 가벼울 것 같다. 빛바랜 졸업앨범 속에 박제된 저 아이를 내 남은 날들 중에 몇 번 이나 더 들쳐보게 될까. 참으로 궁금하다.

9월 추석. 올해도 찾아뵙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산소는 서울에서 너무도 먼 곳에 있었다. 그런데 정말 너무 멀어서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먹고 사는데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에, 혹은 집안 어른들끼리 할아버지의 유산을 놓고 십여 년 동안 벌이고 있는 저 상스러운 불편함 때문에, 가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저 힘들고 귀찮았다. 그래서 기자는 진정한 불효자다. 하나, 두나, 시나, 니나... 할아버지가 돈을 세는 소리다. 시골집 높은 천장에 달린 녹슨 형광등이 이리저리 춤을 추는 그 가녀린 불빛 아래에서, 1년 내내 등골이 휘다 못해 빠질 정도로 농사를 지어서 번 돈을 겨울방학에 내려간 손자에게 주기 위해 할아버지는 밤새 돈을 세셨다. 세고 또 세셨다. 아직도 기자 인생에서 할아버지 보다 용돈을 많이 준 사람은 없다. 손자를 위해서라면 헌신과 희생을 넘어서 맹목적인, 그야말로 눈 먼 사랑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시골에서는 중풍으로 쓰러져서 3일 안에 안 돌아가시면, 3개월 안에 돌아가시고, 3개월 안에도 안 돌아가시면 3년 만에 돌아가신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는데, 정말 할아버지는 자리에 누우신 지 꼭 3년 만에 돌아가셨다. 치기 어린 열정과 젊음의 대학 생활을 보내느라, 아니 더 솔직하게는 마냥 놀면서 흥청거리느라, 병석에 계신 할아버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휠체어에 정말 힘들게 앉힌 다음 시골집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구경시켜드린 것이 유일한 효도였다. 기자가 입대하기 위해 큰 절을 드린 다음 20일 후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모두가 잠든 논산훈련소 화장실에서 밤새 서럽게 통곡하며 그렇게 죄스럽게 할아버지를 보낸 슬픔과 후회를 뼈저리게 반성했건만, 그 뒤 20년 동안 기자가 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은 것은 손에 꼽는다. 죽은 사람을 기리는 산 사람의 기억과 정성은 얼마나 강인하고 오래갈까. 죽은 사람과 얼마나 가까웠고 얼마나 사랑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일정한 세월이 지나면 그 사람이 누구더라도 무덤덤하게 비슷한 색깔로 떠올라 그저 죽은 사람만 불쌍해지는 것일까. 설사 우리네 삶과 인생이 그렇게 허망하고 무정하다 하더라도, 잊지 말아야할 사람은 살아있는 한 잊지 말아야 한다. 애써 그렇게 꼭 해야 한다. 그게 사람이다. 내년 추석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할아버지 산소를 꼭 찾아봬야겠다. 80이 다 된 아버지와 40을 넘긴 아들이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거의 대화는 없겠지만, 그래도 살가운 척 길동무를 하며 그 먼 길을 다녀와야겠다.

12월 9일. 대한민국의 최고통수권자인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다. 대통령을 탄핵시킨 최순실의 첫 공판에서 검찰은 이 사건을 이렇게 규정했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데서 보좌한 공직자와 오랫동안 대통령과 친분을 유지한 민간인이 권력을 남용하고 특정 사기업에 특혜를 준 사건’. 시중 저자거리에서는 이 사건을 이렇게 규정했다. ‘부모를 총탄에 보낸 대통령이 공허함과 외로움을 달래길 없어 오랜 세월 무당 부녀에게 의지하다 나라를 갖다 바친 사건’. 대통령은 억울할 수도 있다. 내가 누구처럼 사람을 수백, 수천 명 사살한 것도 아니고, 천문학적인 숫자의 부정 축재를 한 것도 아닌데, 사람관리 하나 잘못했다고 대통령직에서까지 물러나야 하나... 눈을 치켜뜨고 성토하는 국민들이 원망스럽고 야속할 수도 있고, 이때다 싶어 촛불민심에 올라탔거나 혹여 숨어 있을지 모르는 불온한 세력들의 농간이나 음해쯤으로 치부하고 싶은 유혹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대통령은 물러나야 한다. 지금 우리 국민들이 대통령 탄핵시켰다고 좋아서 날뛰고 있는 것 같은가. 깨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 같은가. 너무나도 날카롭게 베인 깊은 상처를 마음으로 꾹꾹 누른 채 그저 목이 메어 있다. 대통령은 최순실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소리치고 있지만 누구보다 배신의 악령에 홀려 치를 떨고 있는 것은 국민들이다. 당장 기자만해도 정말 이런 꼴이나 보려고 박근혜정부 청와대 출입 기자를 했던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 자기 책임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나서자 공범으로 기소된 모든 이들도 자기들 잘못은 없다고 악다구니를 세우는 현실은 더욱 기가 막히다. 좀 더 돌이켜보면 4년 전 그때, 아무리 바빠도 투표를 할 것 그랬다. 기자의 한 표가 투표 결과에 무슨 영향을 미쳤을까 만은, 그래도 지금 '난 다른 사람을 찍었다'는 위안이라도 얻지 않았을까. 단군 이래 최악의 시국이다 보니 불안하고 서글픈 마음에 올해 세밑에는 떨어져 있던 피붙이들과 옛 지기들을 예년보다 자주 찾았다. 설사가상으로 사람도 닭도 전례 없는 독감에 걸려 나라 전체가 콜록거리고 있고 기자도 한 달 넘게 감기를 달고 살고 있지만, 기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 시리도록 정답게 속정의 체온을 나누고 서로를 위무하고 위로했다. 어김없이 올해의 날들도 다했다. 아무리 나라가 망가졌어도 새해로 돌아서는 길목에서 또 희망을 말하고 바라는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의 저력을 믿고 그 좋은 날을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다리는 것 보다 완벽한 것은 없다. [사회부장] [2016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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