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리모컨을 누르는 손가락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채널은 차고 넘친다. 본방 사수는 옛말, 몇 천원만 있으면 원하는 프로그램을 아무 때나 골라서, 또 몰아서 볼 수 있다. 뛰어놀 운동장이 많아지니 연예인들만 대목을 맞았다. 잘나가는 당대의 스타든, 한 물 간 예능인이든 여기 저기 끝도 없이 나오며 시답잖은 말장난으로 자기들끼리 하루 종일 웃고 떠들고 춤추고 논다. 이제 제발 그만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마치 돌려막기 하는 것처럼 벌써 십 수 년을 저러고 있다. 나라 밖에서 찍는 프로그램도 봇물을 이룬다. 국내에선 성에 안차는 지 비싼 돈 들여 이제는 너도 나도 해외로 나가 시시덕거리기를 반복한다. 이른바 ‘먹방’과 ‘다이어트’가 대세가 된 지도 오래다. 한 쪽에서는 여기가 맛있다며, 이렇게 먹어야한다며 호들갑이고 또 한편에서는 살 빼야한다며 뒹굴고 찢고 난리도 아니다.

그렇게 푸념을 하며 5분도 집중을 못하면서 리모컨을 돌리다 순간 한 채널에서 멈췄다. 저 아이가, 수지구나... 그래, 저 아이가 수지였다... 몇 해 전 이 나라 3, 40대 남성들의 혈관을 녹이며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던 ‘국민 첫사랑’ 수지가 저 아이였구나... 수지가, 우리 수지가 저렇게 예뻤구나... 2천 년대 들어 ‘걸 그룹’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후 기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걸 그룹’ 멤버들의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의 얼굴을 가려내는 것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기자에겐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수지는 한 눈에 알아봤다. 내 또래 남성들이 열광하는 청순가련의 전형은 한마디로, 부담스럽지 않는 얼굴이다. 아무리 절세미인이고 황금비율이어도 진하고 부리부리하면 안 된다. 드세어 보이면 안 된다. 수지에게는 그 옛날 ‘사랑이 꽃 피는 나무’의 ‘이미연’이 들어있고 ‘마지막 승부’의 '심은하'가 살아있다.

우리의 첫사랑이 다 수지만큼 예뻤던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도 속으로 다 인정한다. 다만, 믿고 싶은 것이다. 아득히 멀어져 이제는 추억은커녕 기억조차 암담한 나의 첫사랑이 수지처럼 예뻤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두고 온 그 세계가 다시 찾아와 내 심장을 두드린다. 허겁지겁 아등바등 먹고사는 데만 급급해 애써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이 어느덧 나의 눈물이 되어 글썽거리게 한다. 그 세월에는 금방 다시 만날 것처럼 돌아섰다 20년 넘게 연락이 끊긴 선후배가 있었고, 한 학기 내내 윌리엄 포크너와 버지니아 울프를 심어주신 노교수님이 있었다. 교정 뒷동산을 어지럽히던 막걸리와 먹다 남은 파전 조각이 있었고, 막차 시간이 늦어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학교 담벼락을 부여잡고 웩웩거리던 나의 등을 두들겨주던 그녀가 있었다.

수지가 울고 있다. 한 손에는 남자주인공이 던지고 간 푼돈을 주워들고 위태롭게 쓰러질 듯 걸어가며 울고 있다. ‘수지, 네가 쓰러지면 저 돈 많고 멋진 남자주인공이 달려와 너를 안아 일으키겠구나... 잠깐만 봐도 네가 이 드라마에서 맡은 역은 ‘캔디’구나... ‘캔디’역은 복불복(福不福)인데... 잘 소화하면 연기자로서 인정받고 성장하겠지만 체하면 10년 후에도 우리 수지의 대표작은 여전히 ‘건축학개론’뿐일 것인데...‘ 이런 시시콜콜한 잡생각도 잠시, 어느 덧 수지의 소리 없는 눈물은 묻어둔 내 첫사랑의 편린들을 깨우고 속삭이게 한다. 실로 얼마나 많은 만취와 불면의 밤이 나의 아침을 슬프게 했던가. 정녕 내가 사랑했던 것만큼 나를 사랑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더 살아야 잊을 수 있을까.

수지는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지가 늙는 것은 우리의 첫사랑이 늙는 것이고, 우리의 첫사랑이 늙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점점 소멸해가고 있다는 가혹한 증좌이다. 마치 나의 딸이 커가는 만큼 나는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의 저밈과 쓸쓸함이라고나 할까. 내일 죽을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당장 오늘을 사는 나의 바쁜 일상과 할 일을 헝클어뜨리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나도 반드시 죽는다는 진리를 문득 문득 버거운 삶 속에서 마주하노라면 소스라치는 두려움과 낯선 허망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어머니는 때가 되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잠깐 건너가는 게 죽음이라며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담담해질 것이라고 하셨지만 불혹(不惑)을 훌쩍 넘기고도 나는 아직 죽음에 초연해지지 못했다. 굳이 미당(未堂)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늙어가는 것은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그래서 오늘도 눈부신 수지를, 이 모습 그대로 영원히 잡아놓고 싶은 마음에 한 번 더 찾아보게 된다. 진정 함부로 애틋하게. [사회부장] [2016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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