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전경윤 BBS 기획보도대응팀장 
출연 : 박칼린 뮤지컬 감독 
방송 : 2024년 4월 28일(일요일) 저녁 6시 20분(BBS 라디오)

전경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대산 월정사를 무대로 창작 뮤지컬을 선보였던 박칼린 뮤지컬 감독이 이번에는 무속 신앙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불교 집안에서 자란 박칼린 뮤지컬 감독 오늘 만나볼 주인공입니다. 우리가 이제 월정사에서 뮤지컬 작품을 우리가 본 적이 있습니다. <리파카  무량>이라고요 그래서 더 알려지신 분인데 오늘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칼린 : 안녕하세요. 

전경윤 : 여전히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건강은 전혀 문제가 없는 거죠?박칼린 : 네 좋습니다.전경윤 : 건강 관리를 따로 하십니까? 조깅을 한다든지 무슨?

박칼린 : 산, 그리고 바다 수영을 되게 좋아하고요.

전경윤 : 바다 수영이요. 그거 위험하지 않습니까? 깊은 데서 하는 건데

박칼린 : 떠 있는 거는 똑같잖아요. 깊거나 얕거나.

전경윤 : 산을 좋아하시는구나. 예 알겠습니다. 지난 2022년에 월정사에서 뮤지컬 작품을 올린 이후 불자들과 다시 만나게 되신 겁니다. 사실 그래서 불자 여러분들 불자라는 건 불교를 믿는 분들이거든요. 인사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칼린 : 안녕하세요. 뮤지컬 만들고 있는 박칼린입니다. 다시 오늘 또 불러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많은 좋은 얘기 나눠요.전경윤 : 저는 사실 이건 제가 궁금해서 여쭤보는데 박칼린이면 좀 이름이 독특하거든요. 무슨 다른 종교적 의미가 있나요?박칼린 : 아닙니다. 제가 잘못 아마 첫발을 디딘 것 같은데 원래 공식 명칭은 Kolleen Sue Park(칼린 수 팍)이에요. 그런데 한국이니까 원래 다들 성을 앞에 놓고 뒤에 이름을 쓰는데 하필 두 글자여서 마치 한국 이름처럼 박칼린으로 써도 되는구나라고 했는데 그게 마치 제 공식 명칭인 줄로 다 알고 있어요. 근데 원래는 Kolleen Sue Park(칼린 수 팍)이 돼야 되겠죠. 그래서 큰 의미는 없고 칼린이라는 이름은 뜻은 있어요. 아일랜드의 작은 소녀라는 뜻이거든요. 

전경윤 : 아일랜드요 리투아니아가 아니고 아일랜드군요. 

박칼린 : 저희 딸들 이름이 다 아일랜드 이름이에요.

전경윤 :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그 어머니가 이제 리투아니아계이시고 너무나 알려진 얘기입니다. 아버님은 한국인이시고. 그런데 요즘 근황이 궁금해요. 최근에 여성지 인터뷰도 한 것도 제가 봤는데 그러니까 새로운 작품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지금

박칼린 : 6월에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국립창극단과 함께 저희가 소재가 조금 어려운데 지난번에 <리파카 무량>이 불교였으면 이번에는 무속 소재로 제가 수년 전에 써놨었던 건데, 이것을 이제 한국의 무속에서는 더 잘 아시겠지만 이 강신의 세상이 있고 세습의 세상이 있는데 음악과 형식이 되게 달라요.

그런데 그게 한국, 그러니까 음악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이 모르는 분도 있고, 늘 화려한 그림, 작두 타고 이러는 그림만 영화에서 보신 듯해서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를 이제 원래 보여드리려고 했던 작품이었는데, 국립창극단에서 하게 되면서 저희가 이제 강신무의 얘기만 한국에서 어떤 대단한 힘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는데 이 오대륙의 이 우주의 소리를 듣고 우주를 빌어주게 되는 큰 만신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세계의 오대륙의 아픔들을 저희가 빌어주는 내용까지 포함한 좀 방대한 무속 작품입니다. 그래서 <만신: 페이퍼 샤먼>입니다. 

전경윤 : 페이퍼 샤먼. 

박칼린 : 네. 종이 무당. 

전경윤 : 종이 무당. 우리가 무속하면은 우리 고유의 이제 민속 신앙인데 약간 부정적으로 보는 부분도 있어요. 약간. 

박칼린 :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전경윤 : 미신이라서 그런 것인지. 

박칼린 : 그것은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고 또 어떤 분들은 기독교가 그렇다고 하고, 이게 서양과 민속, 토속 이게 다 많은 싸움이 있잖아요. 지금도 그래서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저는 종교에 흔히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어떤 나눔의 종교가 아니라 저는 모든 땅덩어리에 토속 신앙을 저는 늘 깊게 좀 들여다보고, 토속은 자연을 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고 자연에서 모든 힘을 얻었던 사람이고 단지 좀 더 예민해서 비가 언제 올 건지 약초를 캐서 어디가 낫게 하는지 이 마법을 부릴 수 있었던 게 예민한 자들이 하늘을 읽고 달을 읽고 기후 변화를 읽고 했던 것이 되게 과학적인 베이스잖아요. 자연과학. 그래서 토속 신앙이 어떤 신앙이라는 말 빼고는 그냥 토속 과학자들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되게 그러니까 왜 음지로 지금 한국 내에서는 발달이 돼 있는지는 발전이 돼버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어떤 대륙에서는 5대륙에서는 7대륙이라고 할 때도 있는데 그 토속 신앙을 민속적으로 그 안에서 볼 때는 아직까지도 그래도 되게 큰 자리를 잡고 있는 문화인 거거든요. 그런데 기독교 쪽에서 바라볼 때가 되게.전경윤 : 그렇죠 약간 그렇게 보더라고요.박칼린 : 그런데 그 이전의 것인데 그리고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고 과학 바탕으로 나오는 것인데 그래서 그걸 바로잡으려고 작품을 하고 있습니다.

전경윤 : 그런데 이것 이렇게 어느 정도 이렇게 지식이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좀 공부도, 조사도 해야 되고.

박칼린 : 조사는 엄청 많이 했고요. 그리고 저희가 집안이 또 불교 배경이다 보니 그런데 그 이전에 또 무속과 토속 신앙이 또 있는 집안이어서 어릴 때부터 늘 좀 표현이 좀 그렇지만 끼고 살았다고 그래야 되나요? 그래서 늘 너무 편했던 그래서 제가 이제 불교 집안이라고 할 수는 있는데 저희 한국 집안은. 제가 불교 이론은 전혀 모릅니다. 단지 늘 스님들과 놀았고 저희가 가지고 있던 절이 있어서 암자가 그래서 늘 그 스님들과 주말에는 등 달고 그림 그려주시고 그게 저희 그냥 집안의 하나의 주말에 벌어진 일, 저희 거였으니까. 그래서 이론으로 접근을 한 게 아니라 무속과 어떤 신들에 대한 이야기와 불교까지에, 저는 집 안에 늘 있었던 것이라, 향 피우는 것은 매일 하는 거였고 의미를 그렇게 부여하지 않고 편했던 내용이었죠.

전경윤 : 그러니까 불교하고도 깊은 그게 있어요. 연결고리가. 따라가다 보면.

박칼린 : 예. 이 땅덩어리 그러니까 제가 딱 자꾸 땅 어떤 나라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그 대륙이 옛날에는 선이 없었었잖아요. 안 그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지역이 갖고있는 그 자연문화속에서 나온 게 토속 신앙이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그게 먼저 있었고, 그게 그다음에 불교도 이제 어떻게 그 지역에서 생겼고 또 흘러왔고 이런 거잖아요.

전경윤 : 그 절에 산신각이 있어요. 절에 산신제를 합니다. 그래서 그게 다 관련이 있다고 보이고. 그런데 아까 영어로 이제 페이퍼 샤먼, 무대와 의상이 다 종이인가요?

박칼린 : 제 뜻은 그랬으나 이제 또 안전 문제와 그다음에 실제로 저희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런 부피와 무게 때문에 저희가 많은 부분을 종이로 쓰는 게 있고, 표현을 하는 게 있고, 또 무속이면 한지를 많이 쓰잖아요. 그래서 의상도 일부가 저희는 또 한지로 돼 있는 게 있고, 소품 무대 자체가 한지로 만들어졌다 이런 것이지, 전체가 다 한지는 될 수는 없지만은 그 뜻에서 페이퍼 샤먼이라고 한 것은 아닌데 어떤 백지, 백지에 수많은 글을 써내려갔을 때 소설이 되고 그것을 또 잉크를 물에 담그면 또 없어져서 백지가 되고 종이는 나무에서 와서 또 자연에서 출발을 한 것이고 이거를 접었다 폈다 했을 때 음과 양 그거잖아요.

이 종이접기가 음과 양의 세계라서 그런 배경에서 이제 무당이 어떤 만신이 어떤 토속 신앙을 갖고 있는 수많은 지구상의 샤먼들이 넘나들어야 되는 이런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제 종이 한 장의 이 차이, 이런 것에서 페이퍼 샤먼이라고 지은 거죠.

전경윤 : 제목은 그렇구나. 그런데 그 자료 조사 연구 많이 하시고 어렸을 때 베이스가 그렇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뭐 큰 어려움은 없었네요. 작품 준비하는 것?

박칼린 : 엄청 어려워요. 그러니까 그렇게 알고 있는, 그냥 흡수해서 알고 있는, 스며들어서 알고 있는 것은 나중에 캐다 보면 틀리지는 않는데 다른 분들이 그냥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상대, 제3자한테 설명하기까지가 제가 이론의 용어는 없다라는 것은 이미 알았고 그렇지만 저는 감정으로서의 이 작품을 만들었고 또 작가랑 같이 매일 싸우면서 그들이 이제 이 세상을 알고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까지 캐치를 하는 데가 되게 많은 시간이 걸렸고요. 한 6년 전부터 쓰기 시작을 했었고 이제 이제 완성되어가서 이제 무대에 6월 말 말에 올라갑니다.전경윤 : 그러니까 극장하고 이제 계획은 다 끝난 거죠?박칼린 : 그럼요. 이미 이때쯤이면 이미 작년부터 다 준비를 해야 되는 거죠.전경윤 : 우리 감독님께서 대표님께서 한국 뮤지컬 어워즈 대상을 받으셨어요. 

박칼린 : 작년에요. 

전경윤 : 저고리 시스터즈라고 정말 이런 게 있었습니까? 저는 윤복희 씨가 시초인줄 알았더니 그전에 있었다는 얘기군요.

박칼린 : 아주 전에 있었습니다. 윤복희 선생님은 이제 후배 막내이고요. 1938년에 한국에 제가 그러니까 이론이 언제나 저는 감정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인데 38년 맞을 겁니다. 한국의 최초의 걸그룹 그러니까 그룹이라고 공식으로 돼 있는 게 38년도에 저고리 시스터즈 처음이고요. 그 후로 70년대 후반 그러니까 희자매까지 인순이 선생님이 계시는 희자매에 있었을 때까지가 삼백몇십 팀이 있었어요. 걸그룹이. 그러니까 우리 오늘날의 케이팝 걸그룹의 조상들인 거죠.

그런데 그들을 이제 40년 팀, 50년, 60년, 70년해서 6팀을 저희가 무대에 그들의 어려움과 베이거스에서 킴 시스터즈가 한국을 빛냈던 그런 시절과 윤복희 선생님의 그 또 코리아 키튼즈로 베트남과 순회공연이라고 그러나요. 그런 것을 포함한 그들의 대역사를 좀 조명을 하고, 또 그들의 그 옛날 모습을 그대로 구현을 무대에서 해서 추억의 공연을 또 느껴보기도 하고, 이제 한국에 이런 어마어마한 걸그룹의 여성 베이스가 있었던 나라로 하여금 오늘날의 케이팝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너희들이 혼자 하지는 않았다라는 게 조금 내용에 있어었죠. 

전경윤 : 저고리 시스터즈 저도 좀 생소하더라고요.

박칼린 : 왜냐하면 자료가 없기 때문에요. 왜냐하면 그때 음반이 하나 남아 있고요. 곡이 음반으로 돼 있는 곡이 하나 남아있고 그들의 고증 사진이나 이런 게 얼마 없어요. 그래서 아마 그 뒤로 지금 한국의 음반계가 얼마나 빨리 발전을 했습니까? 그 뒤로 그까지는 되돌아보지는 않았겠죠. 그래서 한번 들춰봤습니다.

전경윤 : 윤복희, 인순이 이런 분들은 이런 분들한테 무슨 뭐 이렇게 고증이라고 그러나. 이렇게 좀 확인 실제로 어땠습니까.

박칼린 : 다 뵀고요. 그랬군요. 그러니까 저고리 시스터즈가 목포의 눈물 이난영 선생님이 계셨던 팀이거든요. 그런데 그 일제 때 그 속에서 이제 이 그룹이 탄생을 했었는데 이난영 선생님이 낳으신 따님 둘과 또 조카가 킴시스터즈를 만들어서 베이거스에서 어마어마한 활약을 했고, 그때쯤에 윤복희 선생님이 또 어린 5살 때부터 해왔던 음악으로 미국도 가고, 한국을 뮤지컬 지금 99편 아마 올해 100편일 거예요. 장악했던 그런 솔로 무대를 가지셨고 그러니까 이들의 그 흐름과 이 내용이 다 연결될 수밖에 없고 그들이 서로 다 알고 그런데 이난영 선생님 빼고는 저는 다 찾아다니고 뵙고 그 허락을 받고 사진 다 얻어오고 힘도 받았고 이거 재조명되면 좋겠다해서 많은 힘을 실어주셨고 밤에 늦게 11시에 전화해도 선생님 그때 뭐 입으셨어요 하면 그때 이게 그때 땡땡이였고 이런 색깔이었어. 우리는 흑백 사진밖에 없으니까 많은 게. 그렇게 많이 도움 주시고 응원해 주셨고 그래서 어떻게 하다가 작품으로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전경윤 : 좋은 작품 좋은 소재를 선택하신 것 같고 저는 좋아하는 것은 방실이라고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바니걸스의 그분도 한 분 돌아가신 걸로. 쌍둥이.박칼린 : 네 바니걸스도 저희 작품에 포함돼 있고 희자매까지 가게 되는데, 그러니까 활동을 한 후에 돌아가시기는 했는데 저희가 그걸 작품에 참 크게 조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쌍둥이로서 어릴 때부터 붙어서 다녀서 하루종일 평생을 같이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이 생겼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악을 불렀는데 언니 없어졌을 때가 엄청 큰 크게 와닿아서 저희 이제 고 선생님한테 이쪽 얘기를 조금 이번에는 조명을 하겠다 해서 그렇게 그러니까 각자 다른 업적을 저희가 기리기도 했고 작품에서 근데 다 뵙고 너무 좋았어요. 대선배들을 그렇게 뵈러 다녔을 때가. 

전경윤 : 예. 하여튼 고생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하셨겠죠. 여러 여건이 좋지 않았겠죠. 제 공연장 시설도 그렇고. 

박칼린 : 그분들이 겪었던 것은 정말, 이제 저고리 시스터즈는 일제 강점기 때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이제 한국인으로서 일본 노래를 해야되거나 한국 노래를 못하게 됐을 때 그 감정이 있었던가 하면, 열악한 환경에 전쟁 직전 그런데 사실은 한국에 한국 전쟁이 있으면서부터 어마어마한 음악 활약이 됐었던 게, 미군 부대를 위문 공연을 하기 위해서 음악 시스템이 엄청 발달해 있었어요. 한국에. 그래서 다 미군 부대로 들어가서 흘러나왔던 가수들이 어마어마하게 활약을 했고 왜냐하면 가장 좋은 시설과 가장 좋은 음악과 가장 좋은 연주자들이 다 거기를 통해서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러니까 전쟁이 꼭 있어야 되는 건 아니지만 이게 불교 사상이잖아요.

음과 양이 언제나 같이 존재한다라는 것, 그런데 전쟁 속에 그 음악 역사가 어마어마하게 태어났었던 거예요. 그래서 아마 한국에 이 케이팝까지 오게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좀 해봅니다.전경윤 : 공부를 많이 하셨어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집안 대대로 불교고 할머니 따라 어릴 때 절에 가서 스님들하고 같이 놀면서 또 절을 갖고 있었고 집 안에서. 그러면 불교와는 뭐 진짜 하나의 삶의 하나의 과정이네요.

박칼린 :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같이 살았기 때문에 이론으로 접근을 해본 적이 없어요. 우리 왜 미국에서 태어나서 영어를 이제 그냥 흡수를 하면 저한테 이론을 물으면 저 아무것도 몰라요. 저는 그냥 영어를 하는 사람이지. 한국말에 오히려 문법을 좀 배운 사람이지. 그러니까 흡수를 하고 자란 사람은 불교 이론 몰라요. 

전경윤 : 이론은 모르지만 어쨌든 자기 스타일은 생활이나 이런 것은. 

박칼린 : 네. 그냥 베어나오는 이거는 뭐다라고 하면 난 모른다. 난 그냥 그렇게 컸다. 

전경윤 : 너와 나는 하나다라든지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 거예요. 

박칼린 : 돌고 돌고, 이런 말들은 쉽게 나오기는 하지만 이론으로 접근을 하지 않았고 진짜 흡수를 했기 때문에 조금 다른 불교인이라고 생각해 주시는 게 아마 맞을 거고요.

전경윤 : 알겠습니다. 선생님을 보면 월정사에서 두 번 공연하셨죠? <리파카 무량>을 발표하셨는데 2021년하고 2022년 2년 연속하셨어요. 아 세 번 하셨습니까? 제가 잘못 알았군요. 불교를 소재로 한 뮤지컬 작품은 처음에 제안하신 게 아니라 제안을 받으신 거 아니에요?

박칼린 : 네 근데 아마 제안을 하셨던 월정사 주지스님께서는 너무 좋은 아이디어를 이제 우리는 그 스님의 뭐라고 해야되나 하나의 어떤 좀 큰 목적 중에 하나가 한국의 탑돌이 있지 않습니까? 그 탑돌이 문화가 좀 더 발달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취지에서 뮤지컬 소재로 탑돌이를 좀 넣어주면 어떻겠냐 했는데 제가 탑에 대해서 써놓은 작품이 있었어요. 한 90년대 초반에. 그래서 넉 달 만에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는 다른 뮤지컬이었으면 저희는 1년 넉 달을 주셔야지 넉 달 안에 못 합니다했는데, 하필 저 대본 있어요. 그렇게 돼서 저는 그때 주지스님께 말씀을 드렸던 게 저는 불교 강요하지 않을 거다. 이거는 스며들어야지 나처럼. 그냥 저는 탑을 만드는 석공의 이야기 근데 하필 불국의, 어느 옛날에 천몇백 년 전에 불국에 살고 있는 어떤 판타지 나라 속에 그 석공이 태어나고 그거를 겪고 의미를 부여를 하고 아픔을 겪고 여덟가지의 이 지식을 얻고 몸에 넣고 그다음에 그 위대한 탑을 쌓는 이런 석공의 입장에서의 작품을 만들겠다. 그리고 그 탑을 지었기 때문에 석공이 탑돌이까지 연결을 하겠다했을 때 좋다. 좋다. 같이 해보자 해서 저는 너무 즐겁게 3년을 또 주셨어요. 완성하는 데까지. 그래서 작게 시작을 해서 그다음에 또 또 디벨롭해서 올리고 작년에 완성을 해서 이제 월정사에서 출발한 <리파카 무량>이 탄생했습니다.

전경윤 : 그런데 이제 보통 이 사찰에서 했잖아요. 공연을. 뭔가 좀 뭐랄까요? 좀 어려운 점이 없었을까요? 아무래도.

박칼린 : 네 물론 많았죠. 어려움은. 왜냐하면 야외 공연은 우리가 자주 많이 하고 할 수 있고 제가 색감을 되게 짙게 쓰고 야외에서 조명 없이 하기에는 참 좋은 작품인데 비가 올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가을에. 단지 딱 그 기후 때문에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 사실은 작품 만드는 것은 아마 가장 편하게 접근했던 작품 중에 하나일 거예요. 왜냐하면 뚜렷이 그 석공이 가는 길은 저는 눈에 보였고 작곡가와 극작을 만들어준 팀이 표현을 참 잘해줬고, 물론 언제나 창작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이제 그 언어 맞추기가 힘들잖아요. 난 이렇게 생각했는데 너는 이렇게 쓰면 어떡하냐 이거에서부터 출발을 했는데, 소재가 명백했고 수년 전에 써놨던 것을 끄집어내서 다듬고 또 불교 쪽에 저희가 자문을 또 두고 그래서 다듬어서 그렇지만은 그냥 예술적으로 접근을 했습니다. 

전경윤 : 이 탑돌이 문화에 대해서 이게 뮤지컬로 표현한다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이게 물론 이제 율동 뭐 이런 것도 가미하고 하면 되겠지만.박칼린 : 네. 그런데 춤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그냥 돌고 그 마음을 비는 거라 그것을 이제 너무 고증에 또 기대면 볼거리가 없고, 그래서 저희는 이제 예술화시켰다라는 게 무대에서의 그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저희가 작품의 큰 틀을 잡았고, 노래 안에서 어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100번 나오면 그 반복에서의 그 올라오는 거 있잖아요. 계속하게 되는 그런데 그게 어떤 부처님 상 앞에서 빌었던 게 아니라 그 석공은 내가 새기는 이 모든 글들과 그림들이 이 돌, 딱딱한 돌에 살아나서 온 우주의 평화를 빌게 해주는 그런 그림으로 탄생을 하면 좋겠다해서 빌 때의 이 느낌과 그러니까 불교를 강압적으로 하지 않고 옆으로 그리고 또 그런 노래들이 가사에서 우리가 참 사람 마음 움직이는 게 가사에서 참 쉽거든요.

그래서 그 기법을 많이 써서 그리고 탑돌이 할 때 어떤 춤으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제 뭐 던지는 것들도 있어요. 가루라든지 해서 그 희열 또 해탈 어떤 깨달음 이런 것들을 좀 시각적으로 좀 많이 부여를 해서 만들었죠.

전경윤 : 그런데 최근에 이슈가 되는 이야기인데요. 그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를 하시잖아요. 그런데 이 뮤지컬 연출하시는 분이 이런 것은 좀 의아하다. 이것은 좀 생소한 걸 텐데 이걸 왜 하셨을까 뭐 이렇게 물어본 사람이 있습니까?

박칼린 : 하나도 왜 생소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다 같은 음악인데 물론 기법과 거기에서 부려야 되는 어떤 음악의 가는 길과 창법과 이런 것은 다 다르고 가사도 너무너무 다르고 그런데 저는 그냥 어릴 때 한국에 나와 있을 때 그때가 토끼소녀와 이미자 선생님이 강세였어요. 그러니까 그 전통 소리에는 이미자 선생님이 계셨고 그 직후에 이제 몇 년 뒤에 그 세상에 가장 예쁜 언니들 둘, 남자들이 홀딱 반했잖아요. 그 토끼소녀한테. 아니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얘기하실 것 같은데 그 당시에 가장 예뻤고 옷을 너무 멋지게 입었던 그리고 노래를 했던 이 장르가 두 개가 달랐는데 강세였었어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도 원래 성악 베이스였지 뭐 전공까지 다 끝까지 안 가셨지만 그렇게 시작을 하셨는데 한국에 오셔서 그 파란 눈에 금발 머리 분이 성악을 하셨음에도 “야 저분만큼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나 처음 봤다.”라는 대상이 이제 그 이미자 선생님이셨고 그때 가장 아마 TV에 많이 나오셨던 분이고 그 멜로디들이 너무나 빨리 흡수돼서 저는 TV가 이렇게 있으면 그때 이제 갓 나왔잖아요. TV가.

70년대에 이렇게 보고 그 흑백으로 이렇게 늘 이미자 선생님 음악 듣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냥 알고 있던 것은 스며들은 것은 전통 트로트이고 지금 얘기하는 전통 트로트이고 오늘 현대 트로트는 또 완전히 색다르게 많이 하지만 그게 몸에 한국 음악 처음 접했을 때가 그거여서 저는 당연히 저는 트로트 너무 재미있고 오늘날 변하는 것도 너무 재미있고 가사도 너무 재미있고 사람들의 얘기잖아요. 막 ‘아트’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사람 사는 얘기라고 가장 근접하게 생각하는 너무 중요한 장르라고 생각해서 저 너무 재미있게 했어요. 제 나름.

전경윤 : 네. 그런데 서울대에서 국악으로 석사학위 받으셨잖아요. 그건 모르는 이들도 좀 있는 것 같은데 국악을 왜 전공하셨죠? 궁금해서 여쭤봅니다.박칼린 : 그러니까 이게 아마 거기서 태어나서 한 3살 때 한국 나와서 한 5년을 자랐잖아요.그런데 이때 큰언니가 한국 무용을 했어요. 

전경윤 : 장녀가 아니시군요.박칼린 : 제가 막내입니다. 딸 셋 중에. 그리고 작은언니는 피아노를 하러 갔고 그래서 저는 그 언니들 따라 양쪽을 다 했는데 아마 서양 음악은 널리 펼쳐져 있는 거라서 저는 미국 다시 들어왔을 때 첼로 전공을 했고 또 어머님이 그쪽이시니까 그런데 지금 방금 말씀하신 대로 조기 교육을 뺄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그게 한국 무용을 할 때 그 리듬과 이 음악이 몸에 배어 있었고 제가 작곡을 할 때도 첼로 할 때도 늘 그게 흘러나왔는데 이것을 똑바로 안 배우면 아버지 나라를 욕되게 하겠네. 이거 어쨌든 첼로까지 전공 다 하고 대학 나왔는데 이제 뭐 더 공부하지 그러면 몸속에 어딘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을 좀 더 제대로 배워보자. 일단 욕이라도 안 얻어먹게 그리고 이제 다시 우리 다 미국 들어갈 때 언니가 했던 장구나 북을 다 들고 들어갔거든요.

그 70년대에. 그래서 그게 늘 집에 있었고 저는 또 대학 때 저희 학교가 민족음악학이 있었던 거라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음악 여러 나라 음악을 진짜 전공으로 했던 과들이 엄청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세계 음악, 월드뮤직을 너무 공부를 많이 했는데 아버지 것을 모르면 이것은 욕 먹겠다 그러니까 그래서 이제 거기서 욕이 나오는 거죠. 그래서 오케이. 다른 나라 음악을 이렇게 4년 동안 공부하고 서양 음악 했는데, 첼로는 평생을 했고 이것은 모르면 좀 욕 먹겠다 싶어서 나와서 다시 이제 공부를 조금 하려고 했던 거죠.

전경윤 : 그러니까 이제 반찬은 다 사놨는데 밥이 없어 예를 들어서 뭐 그런 거 아닙니까?

박칼린 : 아무튼 하나를 해도 제대로 하자겠죠. 뭐.전경윤 : 그런데 누가 이렇게 제가 한 건 아니고요. 편견 없이 모든 문화를 빨아들이는 사람 같다 이게 무슨 뜻이죠? 모든 장르를 다 이렇게 소화를 할 수 있다는 건가요?박칼린 : 소화라기보다는 그러니까 경계선이 안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람의 피부 색깔, 저희 엄마가 있었던 계통이 그 영문학이다 보니 제2의 외국어로서의 영어가 그때 시작이 됐었잖아요. 한국에 영어 학원 언제 처음 생긴지 모르시죠? 

전경윤 : 제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있었던 것 같은데요. 

박칼린 : 71년, 72년도가 저희 엄마가 그때 한국에 처음 영어학원을 세우셨어요. 

전경윤 : 어머니가 사실상 최초란 말씀이죠. 

박칼린 : 서울에 하나 미스 페라르 부인이 하셨고 부산에는 엄마가. 이렇게 두 분이 첫 영어 학원. 그래서 그때는 한국에 이제 그게 필요했었으니까. 그런데 그 얘기를 왜 드리냐면 그때가 영어가 세계적인 언어일까, 컴퓨터 언어일까 해서 이 학문이 그때 엄청 나오기 시작했어요. 70년대에. 그쪽으로 어머님이 깊게 들어가셔서 저희 주변에 미국 사람은 없어요. 다 외국인이에요. 왜냐하면 영어를 배울 사람이 누구예요? 외국인이니까. 주변에 온 세계 사람들이 늘 집에 드나들었고 어머님 주변에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경계선이 없었어요. 피부 색깔 볼 수 없었고 뭔지를 몰랐고 다 너무 섞여 있고 그래서 그에 대한 일체 그게 없는데 뭐를 크게 느꼈냐 하면 차이는 있구나.

그래서 그 차이를 캐치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고 나라, 언어, 누가 영어를 할 때 저 사람은 어느 나라에서 왔다 이거 캐치하는 게 저는 너무 재미있었어요. 영어를 그러니까 말하자면 한국말 할 때 저 사람 전라도네 이렇게 알 수 있듯이, 저 사람 프랑스인가 유럽 어딘데 하는데도 그래서 그것을 캐치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너무 다른 데 결국은 경계선이 없고 똑같아라는 게 돼버리는 게 이게 돌고 도는 이거였죠. 저한테는.

전경윤 : 근데 저는 저도 한국 사람입니다만 스트레스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 분들이. 그리고 팍팍하고 삶이 묻지마 범죄 뭐 이런 것, 인간적인 그런 교류가 많이 단절되고 그래서 <다크나이트>라는 영화를 보면 굉장히 고담시라는 시도 나오는데 굉장히 어두워지고 있다. 사회가. 그게 정부나 개인 모두가 이게 상당히 좀 이런 걸 좀 풀어나가야 될 상황이 아닌가 싶은데

박칼린 : 하필 저희가 지금 불교방송이잖아요. 그러면 종교적으로 접근했을 때는 진짜 책임이 다 큰 것 같고 어떤 종교이든. 왜냐하면 원래 종교의 많은 기초 뜻은 다 좋게 하자라는 제 이론이 지금 서툰 거 아시겠죠? 그렇지만은 저는 그것을 그들도 다 해야되는 일이 되게 많다라고 생각을 하고 저는 ‘왜’ 되게 깊게 파야 된다라고 생각을 해요. 그 ’why’를, 왜 이것을 하는지 왜 저것을 하는지 뭐가 내 피부를 움직이게 하고 살아있게끔 하는지 그러니까 부모의 책임이 저는 윗세대가 엄청 책임이 크다라고 생각을 하고요. 이 아이가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어떤 삶 속에서 태어났을 때 혼자 있지 않았잖아요. 이 3대, 5대 이것에 책임이 엄청 크다라고 생각하고 옆으로 그러니까 사촌 팔촌까지의 책임이 엄청 크다라고 생각을 하고 그 누구도 혼자 있다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데, 태어나게 했으면 말하자면 아이를 낳았으면 그 어마어마한 책임이 있다라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그 사회가 갖고있는 책임, 종교가 갖고있는 책임, 정치가 갖고있는 책임 다 당연히 있는 거고요. 그렇지만 그 한 아이가 태어나서 어른이 돼서 이 지구에 도움을 줄 것 같으면 어떤 도움이여도 내지는 해치지 않고 간다든지 흔적 없이 흔적 안 남기고 잘 있다가 잘 가는 게 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유를 계속 살피는 게 종교잖아요. 내가 왜 태어났지 내가 뭐 하고 가야 되지 오케이 그것에 대한 답 얻을 때까지 그거 계속 살펴가야 된다라고 저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것이 사이드가 돼버리고 먹고 살기 위해서만 달려가는 것이 문제인 것 같고 뭐가 계속 발전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건 큰 오산인 것 같습니다.

저는 태초 때부터 지금 발전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존재가 변화만 했지 발전은 왜냐하면 결국 담배피면 나쁜 연기가 나오고, 차는 빨리 달리지만 매연 때문에 저거 되고, 집을 지어서 좋은데 동물이 갈 길이 없고 그러니까 결국 아무것도 발전이 없다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돌려놓냐 어떻게 잘 공존을 하느냐 이것을 안 살피면 마음 서로 다칠 수밖에 없어요.

전경윤 : 이제 시간이 다 됐습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뭐 하고 싶은 말씀 한 말씀 해주시죠.

박칼린 : 다들 모두 물론 건강하시고 이런 말들은 늘 끝에 하시는데 또 저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제가 혹시 지난 <리파카 무량>도 그 마음을 달래주는 게 있어요. 불교적으로 제 생각에는. 그리고 이번 작품은 비록 무속 작품이지만 우주의 밸런스 그러니까 음과 양이 제대로 갈 수 있게끔 빌어주는 내용이 되게 커요. 제 딴에는. 그래서 혹시 좀 지금 말씀하신 대로 조금 어지러운 세상 속에 있으면 제가 사람을 구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고 저는 제가 크지 않아서 그런 것은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예술 쪽에서라도 사람들의 건강과 안위를 빌어줄 수 있는 게 저는 할 수 있는 게 음악과 예술로서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만일 작품을 보러 오시면 조금이라도 위안을 그런 식으로 갖고 가지 않을까. 제가 큰 거 다른 거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잘 계시고 음과 양 밸런스 잘 가지고 계시고 정말 깊게 오래 잘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모든 시청자분들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전경윤 : 이 밸런스 참 이게 스며드는 것 이게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뮤지컬 연출을 하시는 박칼린 감독님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 대단히 고맙습니다.

전경윤 : 네 박칼린 감독 뮤지컬 연출 외에도 다양한 취미생활 그리고 관심사도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늘 열심히 사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는 생각도 듭니다.  뉴스와 사람들 지금까지 연출에 배진호, 진행의 전경윤이었습니다. 오늘 순서를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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