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총선 사전투표 행렬(서울 마포구)
22대 총선 사전투표 행렬(서울 마포구)

 

지난 22대 총선은 또 한 번 민심의 준엄함을 보여줬다. 앞서 20대 대선에서 박빙의 표차로 현 여권을 탄생시킨 민심은 불과 2년여 만에 압도적 의석 차이로 여소야대 정국을 연출했다. 지역구와 비례를 합쳐 겨우 개헌저지선을 지켜낸 108석의 여권, 이건 어떤 뜻인가 정치권 내 해석은 분분한 실정이다.

 

보통 우리는 취득한 정보와 그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내가 옳다하는 아상(我相)이 깔려 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닌 거다. 그렇기에 결과를 놓고 암만 분석하고 반성을 한다 해도 의식 밑바닥의 근본이 바뀌지 않는 한 수박 겉핥기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게다가 하나를 알면 그만큼 모르는 것이 생기는 역설적인 상황이라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전모를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옳은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어떤 한 가지 사실도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실들과 연결돼 있어 섣불리 사실(fact)’을 확정짓기 어렵다는 깨우침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불교의 한 분파인 유식불교는 모든 인식이 자기 인식에 불과하다는 유식(唯識)’을 주창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넘도록 주문한다. 즉 분별에 토대한 ()’을 무분별의 ()’로 전환하도록 요청한다(轉識得智). 즉 보통 우리들이 파악하는 주관-객관은 허망 분별에 기초한 분별식이며, 그 이전의 안목인 지혜야말로 앎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라는 가르침이다.

 

그런 탈출구는 특정 분야 전문가들에게서도 탐지된다. 그들은 보통 우리에게 친숙한 방식과는 다른 앎의 방식을 발휘한다. 장욱진 화백의 이야기를 다룬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사람 장욱진>에서 저자 정영목 교수는 장 화백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아는 것이 걸림돌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장 화백의 인식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 있고 작품 또한 그렇기에 어떤 틀을 가지고 접근하려 하면 어긋난다는 설명이다.

 

정 교수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그리는 행위에의 집중과 반복으로 몰입의 어느 순간 흰 캔버스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의도하지 않은 어떤 의도가 만들어지면 내가 그림인지 그림이 나인지자연과 나와 그림의 일체감이 찾아올 때 작가의 가슴은 뛴다... 순간의 무의식적인 행위들이, 그 순간의 지금들이 현재진행형으로 모아져 저절로 그림이 된다. 화가의 말대로라면 그림이 스스로 그림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장 화백에게는 그림이 나뉘어 있지 않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이 절로 된다는 이야기는 불교의 무아(無我)’와 통하는 대목이다. 장 화백은 사실을 둘로 나눠 파악하는 보통의 인식 방법과는 다른 불이(不二)’의 방식을 어느 샌가 터득했던 것 같다.

 

이념이나 정파적 논리에 매몰돼 상대편을 적으로 돌리는 한, 정치권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각자 근거하고 있는 논리를 내려놓고 진정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때만 희망이 있다. 전문적인 수행자 같은 안목은 아니더라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명상을 통해서라도 공통의 인식 기반을 확인함으로써 진정한 상생의 정치를 이뤄나가기를 바란다. 자기네를 찍은 국민만 국민이고 상대편을 찍은 국민은 국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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