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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이희진 울산박물관 학예연구관

방송 : 2023년 4월 23일(일요일) 저녁 6시 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넘어진 채 천 년의 세월을 견디신 경주 열암곡 부처님을 바로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37대 조계종 총무원의 중요 사업으로 선정되고, 며칠 전에는 총본산 조계사에서 천년을 세우다 추진위원회 출범식도 열렸습니다. 이제 열암곡 부처님을 바로 세우는 일이 불교계를 넘어서 전 국민적인 지지와 성원 속에 원만히 회향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2005년이죠, 식목일 날 화마로 소실됐던 양양 낙산사가 전 국민적인 후원 속에서 복원되었던 좋은 기억을 떠올리면서 열암곡 부처님 바로 세우기 또한 그러한 전통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울산박물관에 근무하시는 이희진 학예 연구관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네. 앞서 소개해 드린 대로 울산박물관에 근무하시는 이희진 학예연구관님 전화로 연결돼 있습니다. 이희진 학예연구관님 안녕하세요.

 

이희진 : 네 안녕하십니까.

 

김봉래 : 네 반갑습니다.

 

이희진 : 네 반갑습니다.

 

김봉래 : 현재 우리 불교계의 가장 큰 숙원 과제 가운데 하나가 경주 열암곡 부처님 바로 세우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열암곡 부처님에 대해서 심도 있게 말씀을 들었으면 하는데요, 먼저 우선 우리 BBS 청취자들께 본인 소개와 인사 말씀 주실까요.

 

이희진 : 네 안녕하세요. 울산박물관 학예연구관 이기진입니다. 불교계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열암곡 부처님과 관련해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김봉래 : 우리 불교계에서는 지금 5cm의 기적이다 이렇게 불리는 열암곡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우리 한국불교의 자존심을 확인하고 또 불교 중흥의 초석을 다지는 일로 기대감이 굉장히 높거든요. 그래서 지난주에 천 년을 세우다 추진위원회 출범식이 한국불교 총본산 조계사에서 열렸고요, 또 오는 28일에는 열암곡 현장에서 기도 입재식도 예정돼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지난 주에는 체계적 보존을 추진하기 위한 세미나도 열렸습니다. 우리 연구관님께서도 참석한 세미나죠. 이런 전체 흐름 전체적으로 좀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요.

 

이희진 : 경주 남산에 조성된 석조불상 중에 얼굴의 상호가 상호를 비롯한 전체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작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얼굴을 비롯한 전체 모습이 온전한 열암곡 마애불상의 발견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기적 같은 일은 한국불교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불교미술사학도에게도 남산의 불교조각사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지난 14일 열렸던 세미나에서 마애불상에 대한 내용 직접 발표를 하셨기 때문에 이 시간에 모시게 됐는데요, 연구관님께서는 어떤 발표를 하신 거죠.

 

이희진 : 이번 세미나에서는 열암곡 마애불상의 제작 시기, 존명 그리고 열암곡 마애불상과 관련한 당시 사회정치사적 의의에 대해서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열암곡 마애불상은 9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마애여래상이며, 신라 하대 중앙집권 체제를 추구하기 위한 염원이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봉래 : 9세기 전반에 조성이 된 거고요. 존명은 아미타여래상이라는 거고요. 석가모니불이 아니고요. 그런 말씀을 주신 거죠?

 

이희진 : 그렇습니다.

 

김봉래 : 마애불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여쭙기 전에요 지금 경주 남산에는 석조 불상들이 아주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희진 : 그렇죠.

 

김봉래 :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설명을 좀 해주실까요.

 

이희진 : 먼저 2004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남산에는 118구에 달하는 불교 조각이 전해집니다. 이 중 석조불상은 42개소 93구가 있고요. 그리고 이 석조불상을 원각 불상과 마애불상으로 나누면 원각불상은 25개소 29구이고요 마애불상은 17개소 63구가 전해집니다.

 

김봉래 : 원각불상 또 마애불상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청취자들을 위해서 간단히 좀 설명을 해 주실까요.

 

이희진 : 쉽게 말해서 우리가 미술 시간에 배웠던 환조와 부조라고 보시면 됩니다. 원각불상은 환조의 불상이고, 전체 둘러볼 수 있는 형태이고, 마애불상은 부조 형태죠. 한 면만 볼 수 있는 것. 바위에 새겨진 불상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그리고 불상을 셀 때 지금 구라는 말을 썼는데 불교계에서는 좌라는 말도 쓰거든요.

 

이희진 : 그렇죠. 이게 구라는 게 사실은 학술적인 용어로 한 구, 두 구, 세 구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 불교방송에서 구라고 쓰는 것은 조금 무례하기는 하지만 이 부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봉래 : 그래요. 신앙적인 면에서 좌라는 말도 쓰는데 남산의 석조불상이 신라 때부터 조성이 시작된 거죠.

 

이희진 : 그렇죠. 조성 시기 현황을 보면요, 남산의 석조불상은 7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서 조성되었습니다.

 

김봉래 : 그러니까 신라부터 어떻게 보면 고려까지 넘어가는 거 아닌가요.

 

이희진 : 신라 말, 9세기가 신라 말이고요. 그 이후에는 조금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몇 개 전해지는데 거의 남산의 불상 중에서 95%에 해당되는 것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대부분이 조성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 현황을 살펴보면 저도 연구를 하면서 되게 흥미로웠던 게 7세기에는 북남산 일원, 북남산이라는 것은 우리가 봤을 때 경주박물관 인근, 경주 월성 인근이 바로 북남산입니다. 북남산 일원에서 가장 먼저 조성되었고요. 8세기에는 북남산으로부터 점차 남쪽으로 확장이 돼요. 그리고 9세기에는 그동안 불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열암곡 불상이 있는 부처님이 있는 남남산의 백운계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지역에서 불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이게 북쪽에서부터 점차 남쪽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말씀이시고요.

 

이희진 : 그렇죠. 그렇게 되면 왕경의 확장과도 연관되기도 하죠.

 

김봉래 : 그렇군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지금 초점으로 맞추고 있는 마애불상, 아미타여래상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이게 열암곡에서도 제3사지에 있다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이희진 : 먼저 열암곡이 있는 곳은 9세기에 집중적으로 불사가 이루어졌던 남남산의 끝단에 백운계라는 큰 계곡입니다. 이 계곡에는 열암곡을 포함해서 양조암곡 심수곡 백운곡에 각각의 절터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 열암곡에 세 곳의 절터가 보이는데요. 제1사지 제2사지 제3사지를 포함해서 산지가람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중에서 맨 위쪽의 제3사지에 열암곡 석조여래좌상과 마애여래입상이 조성되었습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그 열암곡에 관심 있는 마애여래입상은 이제 아미타여래인데 그것 말고 또 석조여래좌상도 같이 있군요. 열암곡에.

 

이희진 : 그렇죠.

 

김봉래 : 그렇군요. 그 중에 이렇게 앞으로 엎어져 있는 부처님은 마애여래입상, 아미타부처님이고요. 그래요. 그러면 이 마애여래불상을 포함해서 전체 사찰의 규모도 추정해 볼 수 있는 건가요.

 

이희진 : 그렇죠. 우선 열암곡 마애불상과 같은 절터에 있는, 앞서 말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석조여래좌상은 정비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때 우연치 않게 마애불상이 발견됐죠. 우선 열암곡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제3사지는 동서 15m, 남북 11m 정도의 평평한 대지 위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앙의 석조여래좌상으로부터 남동쪽 30m 떨어진 위치에 마애여래입상이 있었습니다.

 

김봉래 : 아. 이 아미타여래 입상이요.

 

이희진 : 그렇죠.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석조여래좌상과 마애여래입상 사이에는 특별한 구역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역으로 보고 있고요.

 

김봉래 : 같은 절터였다는 거죠.

 

이희진 : 그렇죠. 그렇게 보면 우리가 말하는 열암곡 마애여래 입상을 포함해서 절의 전체 규모는 동서 32m 남북 31m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이 마애불상, 아미타여래입상, 처음 주목된 것이 2007년도라고 알고 있는데요. 사실 그 때 저도 취재차 한번 내려갔던 것 같은데, 거기가 굉장히 경사진 곳이거든요. 그래서 동서 32m 남북 31m다 그러면 그렇게 넓지도 좁지도 않는 그런 것 같은데 이게 2008년도 12월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이 마애불상이 복원됐다고요?

 

이희진 : 이게 조금 사람들이 봤을 때 조금 헷갈릴 수가 있는데요, 일단 마애불상이 발견된 시점은 2007년이고요, 2008년에 복원된 건은 마애불상이 아니라 석조여래좌상입니다.

 

김봉래 : 아. 같이 인근에 있는.

 

이희진 : 같은 사역에 있는. 여기서 제가 설명을 조금 더 하자면요 열암곡 절터의 주존불로 추정되는 불상은 석조여래좌상인데요, 원래는 불상의 머리와 대좌의 중대석이 없어진 채로 여래상과 하대석, 광배 등이 파손돼서 주변에 흩어져 있었어요.

 

김봉래 : 그렇군요.

 

이희진 : 그러던 중에 2005년 10월 23일에 경주남산연구소라는 곳이 있는데요, 그 곳의 한 회원이 이 주변을 답사하던 중에 우연치 않게 부처님의 머리를 발견하게 된 겁니다. 이 계기로 경주시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조사를 의뢰한 거죠. 그래서 열암곡 석가여래좌상 주변을 발굴 조사와 보수 정비를 거쳐서 2008년 12월에 석조여래좌상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된 거죠. 그런데 이 발굴 과정에서 우연치 않게 발견된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한 열암곡 마애불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거죠.

 

김봉래 : 그렇군요. 5cm의 기적을 그 때 발견한 건데, 그러면 5cm의 기적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연구 성과들이 그 동안에 많이 쌓였겠어요.

 

이희진 : 이게 되게 안타까운 일인데요, 마애불상이 발견된 지가 15년이 지났잖아요. 사실 이번 학술대회 이전까지는 조사보고서 3권 그리고 논문 5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5편 논문 중에서 3편은 지질학 관련 논문이고요 2편은 미술사 논문입니다. 이게 발견된 시점을 생각하면 연구 성과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죠. 아마도 열암곡에 대한 문헌 기록이나 전해지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접근하기가 되게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김봉래 : 그래요. 차례로 알아볼 것이 우선 제작 연도가 마애불상이 9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 근거는 뭘까요.

 

이희진 : 일단 저도 처음에 연구를 하면서 되게 힘들었어요. 마애불상이 지금 넘어져 있으니까 전체 온전한 모습을 보기도 힘들잖아요. 그래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도록에 있는 3D 스캔의 모습을 갖고 비교를 했는데요, 그래도 이 불상과 딱 들어맞게 비교될 수 있는 불상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절대 연대가 있는 불상이 하나 있었는데요, 801년작인 경남 함안 마애약사여래삼존상 중 본존상이 어느 정도 비교가 됐습니다. 이 본존상을 보면 봉긋하게 솟아 있는 육계, 그리고 사각진 얼굴, 그리고 대좌가 단판, 연잎이 한판으로 돼 있는 거죠. 단판 연잎 구조로 돼 있는 대좌의 양쪽 발끝을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이 모습이 너무나 신성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9세기 전반작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삼릉계 선각육존불 중 서면 본존 입상이 있는데요, 이것과도 되게 많이 비교가 되죠. 손의 위치라든가 편단우견의 대의 착의법, 그리고 허리를 강조하는 옷주름 등에서 양식적 친연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양식을 비교한 결과 열암곡 마애불상의 제작 시기를 9세기 전반기로 추정했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이 불상이 서 있는 입불인데요, 좌불이 아니고요. 아미타여래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또 석가모니여래상이다 이런 논란도 있었나 봅니다.

 

이희진 : 일단은 우선 같은 사역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석조여래좌상은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여래상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죠. 그렇다면 마애불은 우선 같은 사역에 석가모니 부처님 두 분이 있을 수가 없거든요. 그렇다면 일단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또 되게 특이한 점은 열암곡 마애불상의 옷주름이라든지 수인이 굉장히 독특해요. U자형의 옷주름이 반복적으로 흘러내리고 수인을 보면 한 손은 가슴에 올리고 다른 한 손은 아랫배 아래쪽에 내린 모습이에요. 이런 형식은 같은 남산에 출토된 왕정골 석불입상과 같은 유형으로 볼 수 있어요. 이런 불상들이 현재 한 8점 정도 전합니다. 하지만 열암곡 석불입상은 이 유형과 편단우견식대의와 손의 좌우가 바뀐 점이 다르지만 이 유형의 불상이 대부분 오른손을 엄지와 검지 또는 중지와 결하고 있는 모습이 있어요. 이런 수인은 720년작의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이나 8세기 후반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미타여래상의 수인인 구품인의 또 다른 유형의 구품인일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리고 열암곡 석불입상의 원위치가 바로 세운 다음에 서향을 향하고 있어요. 바라보는 방향을 생각한다면 아미타여래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생각하는 거죠.

 

김봉래 : 이제 우리가 이 부처님을 바로 세우게 되면 바로 서향을 바라보는 그런 입불의 형태로 우리가 되는 거군요. 그래서 아미타부처님이라고 우리가 보고 있는 거고요. 그런데 어쨌든 이 마애불상의 사상적인 근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고요.

 

이희진 : 이 문제는 좀 되게 고민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이번 학술대회를 준비하면서 사상적 근거를 찾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을 했거든요. 그래서 확실한 근거는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불상의 조성과 관련해서는 화엄사상과 아미타 정토사상이 결합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이에 대한 연구는 진행을 하고 있고요, 앞으로 논문을 써보려고 합니다.

 

김봉래 :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울산박물관에 근무하시는 이희진 학예연구관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연구관님 그런데 남산 석조불상의 정치사회적인 의도, 이번에 찾아보신 거죠.

 

이희진 : 네 그렇죠.

 

김봉래 : 어떤가요.

 

이희진 : 이번 연구를 하면서 굉장히 고민스럽고 궁금했던 점이 뭐냐 하면 남산에 9세기에 들어서 대형 마애불이 조성됐다는 점입니다. 특히 보면 560cm의 열암곡 마애불상을 비롯해서 860cm의 약수곡마애여래입상, 521cm의 삼릉계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그리고 삼릉계 제6사지 선각마애불상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거든요. 이런 대형 마애불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현상입니다. 9세기에는 아무래도 신라 하대에 왕위 계승에 대한 치열한 경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요, 물론 이런 경쟁은 왕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 확보에 대한 필요했던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되게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요. 신라 왕에게 헌상된 서상물에 대한 기록들이 있는데요. 서상물이라는 것은 특이하게 생겼던 특별한 물건들이에요. 식물이나 동물들인데요. 흰색 꿩이라든가 이런 거죠. 이런 내용을 바친 기록을 보면 왕의 즉위나 태자 책봉, 국가의 중대사 등과 관련해서 지방에서 서상물이 헌상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하대의 왕에게 헌상된 서상물에 대한 기록이 집중되는데요, 원성왕 때인 758년부터 헌덕왕 때인 825년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그 횟수도 11회에 달합니다. 왕이 즉위와 관련된 경우가 많았고, 이런 상황은 아무래도 왕권의 강화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통해서 중앙집권적 체제를 추구하기 위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왕권 강화나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불교의 힘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불교 국가니까요. 이것은 불사로 이어졌을 것으로 생각되고, 이런 상황에서 남산의 대형 마애불의 조성은 왕실의 안녕이라든가 신라 왕권을 수호하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생각됩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그런데 어쨌든 이 불상이 넘어지게 된 것이 그 원인이 지진으로 인한 것은 맞나요.

 

이희진 : 일단 마애불상이 넘어진 것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어요. 단지 어떤 충격에 의해서 넘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것이 지진이었을 가능성도 높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일단 경주에서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지진이 많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지진은 2016년 9월 12일 경주 지진으로까지 이어지니까요. 기록상 전해지는 지진을 보면 779년 혜공왕 15년 경주 대지진, 고려시대에는 크고 작은 지진이 계속 있었고요. 조선시대에는 1430년 세종 12년에 경주 지진 등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고려시대 고려사를 살펴보면 현종 3년인 1012년부터 인종 12년인 1134년까지 거의 매년 지진이 일어났었거든요. 그리고 기록에 보면 천둥 같은 소리가 났다고 전해집니다. 이상의 기록을 보면 지진으로 인해 넘어졌을 가능성이 높고요. 어쩌면 천둥 번개를 동반한 낙뢰에 의한 가능성은 또 있다고 생각해요.

 

김봉래 : 그래요. 어쨌든 이 마애불상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이제 한국불교의 자존심을 다시한번 확인하는 그런 계기도 되겠는데요. 이게 기술적으로 쉽지 않다 그런 일부 지적도 있어요. 어떻게 보세요.

 

이희진 : 그런데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서 보면 기술적인 문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제시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경주 남산이 2000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됐다는 점이죠. 그런 점에서는 해결돼야 할 절차가 굉장히 복잡하다는 점입니다.

 

김봉래 : 절차가 복잡할 거다.

 

이희진 : 그렇죠. 그리고 이와 더불어서 열암곡 절터는 남남산에서 가파른 능선 위에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좁은 산길을 통해야 하고. 이런 점에서 중장비를 실은 대형차가 올라가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점이죠.

 

김봉래 : 일부 또 의견은 굳이 바로 세울 필요가 있느냐, 있는 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원형 보존에 좋지 않느냐 이런 의견도 있어요.

 

이희진 : 그렇죠. 이제 이런 문제는 사실 양면의 동전과 같은 문제입니다. 처음 발견됐을 때는 당시 5cm 기적이라는 불교의 영험함이 있었잖아요.

 

김봉래 : 예. 5cm의 기적이요

 

이희진 : 그렇죠. 그러면 현재 상태를 보존하는 것이 어쩌면 좋은 방안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발견된 지 15년이 지났어요. 이런 문제는 마애불상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가 지적되는데요. 2021년 대한지질학회 학술대회에 발표된 논문에 보면 비가 많이 왔을 때 마애불상 하부 지표면이 일시적인 물고임 현상이 일어나서 장기간에 강우가 오면 지표 토양이 침식되고 마애불상을 불안정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보는 거죠. 그리고 지면을 향하고 있는 마애불상이 풍화나 침식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됐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마애불상 머리를 바치고 있는 암벽도 조금 균열이 가고 있거든요. 마애불상의 영험성을 위해서는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좋기는 하지만 앞으로 마애불상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보존적인 측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현재보다는 아무래도 세워서 관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김봉래 : 그래요. 불교계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의 관심과 호응을 받고 있는데 예전에 양양 낙산사가 화마로 소실되었을 때 전 국민이 동참해서 복원을 이뤄냈거든요. 그런 것이 이번 마애불상을 바로 일으켜 세우는 데도 가능할까요.

 

이희진 : 2005년 강원도 양양 화재는 큰 충격이었죠.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연구자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정말 안타깝게 생각했던 겁니다. 당시에 소실된 문화재에 대한 복원 문제에 대해서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복원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하지만 아무래도 국민들이 소실된 문화재에 대한 안타까움이 되게 컸단 말이에요. 그래서 원형이 아니지만 복원해서라도 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낙산사 복원에 큰 불사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어쩌면 열암곡 마애불상도 마찬가지로 우리 불교계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관심사가 모아지면 낙산사와 같은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입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시간이 별로 남지는 않았습니다마는 그래도 전통문화가 우리 국민들 또 나아가서 전 세계인에게 공감을 얻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요, 우리 학예연구관님께서는 박물관에서 주로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신지요.

 

이희진 : 울산박물관은 산업수도 울산이라는 이미지에서 문화산업도시 울산으로 이미지를 변신하기 위해서 2011년 6월에 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개관한 지 12년이 지났는데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이 12만 점이 넘어갈 정도로 굉장히 성장했어요. 저는 박물관의 개관 멤버로 참여했었고 현재는 유물관리팀의 팀장으로 박물관 유물 수집, 관리, 보존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자랑하자면 다른 박물관에 비해서 유물 기증 문화가 활성화돼 있어요. 그리고 시민들이 국가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를 흔쾌히 기증하는 사례는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 박물관에 굉장히 많이 기증을 해 주십니다. 그만큼 울산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항상 저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봉래 : 관련해서 혹시 정부나 불교 종단에 건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으실까요.

 

이희진 : 일단 제가 박물관 생활을 해인사 성보박물관에서 먼저 시작했습니다.

 

김봉래 : 해인사요. 반갑습니다.

 

이희진 : 그래서 불교인의 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요, 그래서 사찰 생활이나 스님들의 고충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 불교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항상 고민을 하고 있고요. 일단 사람들은 마음의 편안함을 위해서 종교를 찾지 않습니까. 종교 또한 대중에게 관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봉래 : 친절해야 되죠.

 

이희진 : 그렇죠. 그리고 이를 확대하면 국가 또한 국민들에게도 관대해야 돼요. 편안하게 해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일단 지금 살기 너무 힘들잖아요. 힘든 시기다 보니까 그래서 불교나 사찰이 지금처럼 힘든 시기에 대중을 편안하게 안아줄 필요가 있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더 행복한 날이 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저희 불교계에서도 사실은 불교문화를 통한 포교의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고 있거든요. 이런 면에서 저희 불교방송 같은 미디어에 대해서도 조언을 주실 내용이 있으실까요.

 

이희진 : 일단 종교에서는 포교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찾아가서 불교의 넓은 아량과 깨달음의 가치를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언제나 제자들을 이끌고 전국 각지에 탁발을 하시면서 설법을 베풀고 깨달음을 널리 알려주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로 인해서 교단을 확장하고 또 불교 포교의 근본이라는 점을 알려주시기도 했습니다. 인도에서 굽타 왕조 이후에 불교가 힌두교에 밀려서 거의 사라졌다는 점은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스님이 대중을 먼저 찾아가지 않고 대중이 사원을 오길 기다렸고 또 사원의 문턱을 높여서 일반 대중들이 다가가기 힘든 상황을 만든 결과죠. 그렇다면 적극적인 포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디어가 발달한 요즘 시대에 미디어를 통한 포교도 적극적인 포교에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끝으로 우리 연구관님 향후 계획 듣는 것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희진 : 저의 연구 성과는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계속 경주 남산 석조불상에 대해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남산의 석조불상에 대한 문헌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연구에 굉장히 어려움이 있어요. 그렇지만 어려운 과제를 하고 나면 되게 힘들었지만 뿌듯한 느낌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왠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아직 걸음마 수준의 연구자지만 앞으로도 남산 석조불상 연구를 조금씩 더 해 나갈 생각입니다. 잘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봉래 : 귀한 시간 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희진 : 감사합니다.

 

김봉래 : 지금까지 울산박물관에 근무하시는 이희진 학예연구관님과 함께했습니다.

 

김봉래 : 여러분 이희진 학예연구관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저는 오늘 말씀 들으면서 넘어진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얼마나 귀한 시절 인연을 맞이했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해서 마애불상 자체에 대한 연구도 더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렇게 부처님 상을 바로 세우는 일에 불교계를 넘어서 전 국민적 동참이 이뤄진다면 바로 국민 화합과 상생으로 가는 좋은 길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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