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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권선아 공감과자비연구소 소장

방송 : 2023년 2월 26일(일요일) 저녁 6시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입니다. 플럼빌리지를 이끌었던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 틱낫한 스님의 입적 1주기를 맞아서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특히 평소 스님을 존경해온 사부대중들이 스님과 인연이 있는 곳들을 순례하면서 스님의 크신 뜻을 이어받아 더욱 정진하겠다 하는 다짐하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마침 틱낫한 스님의 1주기를 맞아서 스님의 젊은 시절 행적을 보여주는 일기가 우리말로 번역돼 주목받고 있습니다. <젊은 틱낫한의 일기>라고 하는 제목인데요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조계종 국제포교사이면서 공감과자비연구소를 이끌고 계신 분이시죠. 권선아 박사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네 앞서 소개해 드린 대로 공감과자비연구소 권선아 소장님 권선아 대표님 불교방송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권선아 소장님 안녕하세요.

 

권선아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김봉래 : 틱낫한 스님 1주기를 맞아서 최근에 베트남에 다녀오셨다고요.

 

권선아 : 네. 지난 1월이 틱낫한 스님 1주기여서요 1월 1일부터 15일까지 베트남, 스님이 출가하셨던 출가 본사이자 또 열반에 드신 그 후에의 뚜히에우 사원에 갔었고요. 또 스님이 1957년에 처음 일구기 시작하신 프엉보이, 이 <젊은 틱낫한의 일기>의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는 그런 공동체도 직접 가서 그 땅을 밟고 걷고 앉아서 명상도 하고 그런 시간도 보냈고요. 또 스님께서 젊은 날을 보내셨던 곳이 후에, 달랏, 이런 지역들인데 그 근처에 스님의 흔적이 있는 스님이 공부하고 새로운 불교를 위해서 고민하시고 또 젊은 후학들을 가르치시고 저술도 하시고 그랬던 곳들을 두루 순례했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스님이 1926년생이시고 2022년에 돌아가셨는데 오랜 기간 망명을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말년에는 그래도 고국의 품에 안겨서 활동을 하시고 편안하게 이렇게 사실은 여생을 마치신 셈인데, 소원대로 만년에는 고국의 품에 안겨서 돌아가신 거예요.

 

권선아: 네네. 스님이 그 전에는 미국에서 재활 치료를 받으시기도 하시고 또 프랑스에 잠깐 플럼빌리지 돌아와서 머물기도 하시고 그러다가 또 태국에 있는 플럼빌리지에 가서 태국이 기후가 따뜻하고 또 태국의 플럼빌리지 공동체에서 스님을 전적으로 뒷받침하는 그런 의료진들이 있으셔서 태국에 오래 머무셨는데, 스님께서 남은 생은 베트남에서 보내고 싶다는 바람을 제자들에게 표현을 하셔서 2018년 11월에 베트남의 뚜히에우 사원으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뭐라고 그럴까요. 그냥 하나의 환지본처라고 해야 되나요. 스님이 그 절에서 16살에 출가를 하셨던 그 곳인데 다시 세계 곳곳을 다니시면서 법을 펴고 자비의 수행을 널리 전하신 그런 어떤 삶을 마무리하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셔서 여생을 보내셨다는 게 굉장히 의미가 있는데요, 휠체어를 타고 계셨지만 법당에 참배하러도 가시고 스님께서 젊은 시절에 많은 시간을 보내셨던 연못이나 부도탑 주위에서 제자들과 걷기도 하시고 이것이 저희에게 의미하는 것은 뭐랄까 우리가 속해 있는 어떤 깊은 정신적 뿌리가 있다는 것, 영적 뿌리가 있다는 것, 그것을 저희에게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가 언제나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스님의 안거에 직접 참여를 했든 아니면 스님의 책이나 법문을 통해서 스님의 가르침을 만났든 그것은 모두 우리가 이 지혜와 자비의 거대한 흐름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그래요. 저는 틱낫한 스님 하면 생각나는 단어 자체가 인터비잉(inter-being)이라는 단어, ‘연결돼 있다’ 지금 말씀하셨는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젊은 틱낫한의 일기> 이 책을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됐고 어떤 인연으로 번역하게 됐는지 궁금해요.

 

권선아 : 2003년에 한국을 두 번째로 찾으셨을 때 아직 한국에서 출간이 안 된 책들을 많이 가져오셨어요. 그중에서 베트남어로는 ‘프엉보이’고 영어로는 ‘향기로운 종려나무 잎’이라고 하는 그런 책을 저에게 주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냥 처음 책을 딱 받아서 보기에도 이거 1962년부터 66년까지의 일기네, 그것 자체가 너무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우리가 아는 젠 마스터(zen master) 또는 대선사로서 우뚝 서기 훨씬 전의 스님의 젊은 날의 모습, 그런 것들을

 

김봉래 : 네. 30대, 40대

 

권선아 : 40대가 되기 전이죠. 아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었고요. 뭐라 그럴까 이토록 여리고 섬세하고 아름답고 또 사람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으신지를 책의 곳곳에서 느낄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이 책을 꼭 번역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김봉래 : 그게 이루어진 거군요.

 

권선아 : 네. 작년에 이제 스님께서 열반하시고 난 후에 그때 ‘Walk with me’라고 스님의 다큐멘터리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 한국에 소개를 했어야 하는데, 계속 생각만 하고 있다가 올해 영화가 나와야 되겠다 생각을 해서 영화를 수입했던 씨네큐브하고 함께 부처님 오신 날을 즈음에서 그 영화를 상영해야겠다는 그런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번역·자막작업 이런 것을 다 마무리가 된 건데, 그래도 불교적인 내용도 스님의 플럼빌리지의 어떤 수행의 전통, 이런 것들이 잘 전해지게 하려면 감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고집해서 감수를 하면서 하나하나 스님의 여기에 인용됐던 <젊은 틱낫한의 일기>에 나왔던 글들을 만나게 됐죠. 그러면서 이게 시절 인연이구나. 이 영화가 나올 때 이 책이 세상에 나오도록 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번역을 했죠. 그리고 책은 금방 번역을 했는데, 이것을 언제 내는 게 젊은 날의 스님의 삶의 이야기가 세상에 좀 널리 전해질 수 있을까를 김영사랑 같이 열심히 고민하다가 1주기를 맞아서 내게 됐습니다.

 

김봉래 : 어떻게 보면 인연이 딱 맞았습니다. 1주기에 일부러 맞춘 것처럼 제대로 된 것 같은데 보면 1962년부터 66년까지 5년 정도의 기록인데 36세에서 40세, 그 사이의 시절인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좀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는지 개관을 해 주실까요.

 

권선아 : 먼저 1961년부터 62년은 프린스턴에서 공부하실 때고, 62년부터 63년이 거기에서 공부를 마치신 다음에 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생이자 연구자이자 조교로서 머무시던 시절입니다. 그 시절의 기록이 한 축을 이루고요. 64년에는 고국의 스님과 가까이 교류하던 선배 스님께서 고국의 상황이 너무 긴박하고, 이제 나는 이미 너무 지쳤으니 돌아와서 부디 도와달라는 그런 편지를 보내셨어요. 그래서 스님께서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래서 64년부터 66년까지 고국으로 돌아와서 전쟁 중인 베트남의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또 그 당시에 너무나 전쟁의 포화 속에서 고통받던 베트남 민중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던 그 시절의 기록입니다.

 

김봉래 : 네. 내전 중이었죠. 어떻게 보면 참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그러고 나서 외국으로 망명을 가서 오랫동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그런 사연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번에 이 책에 등장하는 스님의 공동체 프엉보이인가요, 직접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권선아 : 이번 순례에 정말 프엉보이를 갈 수 있었던 게 저한테 굉장히 큰 기쁨이었고요, 저희가 프엉보이를 가는 날 아침에 김영사 편집자님으로부터 메일을 받았어요. 예상보다 하루 먼저 책이 나왔다고. 그래서 그날 저희가 프엉보이를 찾는 그 날. 그 <젊은 틱낫한의 일기>가 한국어판이 나왔어요. 그래서 같이 가셨던 스님들도 그러시고 이거는 정말 우연이 아니다라고 아주 기뻐했었고요. 뭐라 그럴까 스님이 프엉보이에 가시기 전에 약 8년 동안 젊은 승려로서 베트남에 민중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고 사람들의 고통에 더 구체적으로 응답하는 그런 불교를 위한 꿈을 정말 간절하게 꾸셨는데, 그리고 그 길을 정말 치열하게 모색하셨는데, 그것들이 하나도 기성 불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스님은 너무 젊으셨고 스님의 주변에 있던 도반들도 뭐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죠. 그래서 많은 좌절을 겪고 타격을 많이 입으셨어요. 그래서 그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보살필 수 있는 곳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을 도모할 수 있는 그런 곳이 너무나 간절했고 이제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거기서 같이 공부하고 수행하면서 새로운 불교의 길을 계속해서 지치지 않고 모색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일구신 곳이에요. 1957년에 처음 고산족 사람들에게 땅을 조금 사가지고 그 때부터 스님이 몸소 땅을 개간하고 나무를 가져다가 짚을 이어서 그렇게 오두막집을 지으신 그런 곳으로 시작하는 공동체였죠.

 

김봉래 : 지금 새로운 불교의 길이라고 얘기하셨습니다마는 사실은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화두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베트남 불교가 동남아 지역에서는 이례적으로 대승불교권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틱낫한 스님은 당시에 그러면 어떤 문제들을 주로 고민을 했었나요.

 

권선아 : 스님은 젊으셨을 때부터 계속해서 불교가 그 시대 사람들의 고통에 구체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모색을 하셨어요. 그게 곧 불교를 새롭게 하려는 스님의 원력이기도 했고요. 이를테면 마을이 폭격을 막고 사람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신음할 때 과연 승려로서 사찰 안에서 고요히 좌복 위에 앉아서 명상하는 것, 그것만 해도 되는지를 항상 준엄하게 질문하셨어요. 그런데 스님은 그 둘을 다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내면의 수행을 통해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 그 길을 가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고, 또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고통을 치유하는 그런 길에 대한 탐색도 또한 잊지 않으셨죠. 그래서 온갖 도전이 가득 찬 세상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셨습니다. 그것이 스님께서 주창하신 참여불교인데요, 수행과 실천을 다 아우르는 참여불교라는 이름은 스님의 저서 중에서 <베트남, 불바다에 핀 연꽃>이라는 책이 있는데, 한자로는 ‘입세불교’라고 스님이 표현을 하신 그런 새로운 불교의 흐름이죠. 스님은 참여하는 불교를 평생 온몸으로 살아내셨습니다.

 

김봉래 : 흔히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해서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 이런 것도 있지만 어떻게 또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수는 없는데, 당시로서 이런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내면적인 수행을 계속해 나가는, 마음의 평화를 이어나가는 이런 것조차도 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권선아 : 스님은 고통에 응답하면서 수행을 지속하기를 바라셨는데요. 이를테면 사람들이 폭탄 아래서 살아남으려고 뛸 때, 바로 그 곁에서 우리가 걷기 명상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고, 또 폭탄이나 총알에 상처를 입은 아이들을 보살필 때도 역시 마음 챙김의 호흡을 수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런 가운데서 가장 힘든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 또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고 스님께는 고통과 어려움이 가장 훌륭한 스승이었다라고 종종 회고를 하십니다.

 

김봉래 : 어쨌든 그러한 베트남 불교의 권위주의적인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고 보고 이런저런 이유로 베트남 고국을 떠나가게 되는 것인데, 그 전에 나름대로는 베트남 불교 개혁을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하신 거잖아요.

 

권선아 : 그럼요. 스님은 이 <젊은 틱낫한의 일기>에 보면 고위층 승려들이 사람들이 바치는 존경이나 찬사에 눈이 멀어서 무사안일의 상태에 빠져 있다. 불교 수행 자체가 위험에 처해 있다. 이런 진단을 하십니다. 베트남 불교 개혁을 위한 스님의 노력은 정말 평생 아주 가열찬 그런 것이었는데요, 학자셨고 불교 스승이셨고 시인이었고 또 참여불교의 활동가였고 평화운동가였고, 이런 스님은 불교대학을 설립하고 출판사를 만들고, 그래서 불교를 새롭게 하는 그런 모색하는 글을 끊임없이 쓰셨고 평화운동을 위한 잡지도 내셨습니다. 또 전쟁통에 무너진 마을에서 실의에 빠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사회봉사 청년학교라고 하는 풀뿌리 구호단체도 만드셨고요. 또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불교 전통의 보살계에 바탕을 둔 접현종을 만들기도 하셨죠.

 

김봉래 : 종단을 따로 일구신 거예요.

 

권선아 : 네네.

 

김봉래 : 자.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공감과자비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권선아 박사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권선아 박사님은 틱낫한 스님과의 인연이 적지 않은 것 같아요. 1995년에 처음 내한했을 때 그 때도 저도 취재 일선에 있었는데 그 때 박사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권선아 : 저는 95년에는 MBC에서 일하고 있었고요. 그 때 틱낫한 스님이 누구신지조차 몰랐는데 부처님 오신 날 특집으로 스님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해서 그 팀에서 스님에 관한 자료를 읽고 준비하고 프로그램을 같이 고민하고 이런 것들을 했고요. 스님께서 오셨을 때 그 때는 그다지 많은 분이 오지는 않으셔서 관광버스에 저희 방송국 스태프들 전부 다 타고 스님 가시는 곳마다 다 따라다니면서 곁에서 가까이 뵐 수 있었지요. 

 

김봉래 : 그렇군요. 1995년도에 오시고 2003년도에 오시고 2013년도에 오시고 세 번 오셨는데, 그런 인연들 중에서 좀 소개해 주고 싶은 그런 대목이 좀 있으시죠. 스님과의 추억.

 

권선아 : 너무나 많지만 일단 2003년 행사는 제가 전체를 기획하고 또 플럼빌리지에 가서 하나하나 설명드리고 허락을 받고 또 한국에 계신 전 일정을 곁에서 모시고 통역했던 그런 것이기 때문에 모든 순간, 그 봄의 모든 순간이 다 기억이 납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권선아 : 또 아침 일찍 스님과 플럼빌리지 대중들이 계시던 곳에 가서 모시러 가고 버스에 타면 그 날 어디를 가시는지 그날 행사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스님께 설명드리고 또 어딘가를 가고 또 스님 곁에서 스님의 말씀을 통역하고 스님 곁에서 공양을 함께 하고.

 

김봉래 : 아. 공양도 함께 하셨군요. 

 

권선아 : 스님 뒤에서 따라 걷고 스님 공동체가 묵으시던 곳에 다시 모셔다드리고 그런 것을 매일매일 했는데, 그 순간 하나하나를 다 잊지 못하죠. 그리고 비행기로 오실 때 또 조금 덜 고단하시도록 비즈니스 타고 오시라고 해도 그렇게 안 하시고 또 한국 일정이 굉장히 길었는데 무리가 되실 수 있으니까 편안한 차로 따로 모시겠다고 해도 한사코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제자들 곁에 계셨던 것, 그러니까 스님이 한 방울의 물이 아니라 하나의 강물로서 흘러간다는 얘기를 늘 말씀하시고 플럼빌리지는 그야말로 공동체인데 그것을 스님의 삶으로써 몸소 보여주신 것이죠.

 

김봉래 : 아. 그렇군요. 2013년도에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법문 그게 또 특별히 기억나신다고 제가 들었습니다마는.

 

권선아 : 거기서 통역을 하는데 스님께서 이런 질문을 받으셨어요. “스승님은 아라한이십니까?” 승가대학의 스님으로부터. 그런데 스님께서 그냥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No”라고 대답을 하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생에 부처님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부처님께 지금 이 순간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법, 그리고 나의 고통을 보살피는 법, 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 겪게 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다음 생에도 나는 다시 스님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스님인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라한일 필요는 없습니다.” 

 

김봉래 : 달라이라마 성하도 늘 보면 “나는 그냥 오직 스님일 뿐이다.” 

 

권선아 : 네. ‘simple monk’.

 

김봉래 : ‘simple monk’. 그것을 강조하시는데 일맥상통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틱낫한 스님의 수행과 포교에서 마음챙김, 걷기 수행, 뭐 이런 것들이 좀 기억나거든요. 우리나라는 뭐 간화선도 있고 염불, 간경, 여러 가지가 있는데 스님의 수행과 포교의 특징을 좀 얘기해 주신다면요.

 

권선아 : 스님은 마음챙김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시는데요. 스님께서는 마음챙김의 수행을 평생 가르치셨고 마음챙김이 집중과 통찰을 가져오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계정혜 삼학을 이야기할 때 그 마음챙김을 계와 연결시켜서 설명을 하세요. 마음챙김이 있으면 계를 잘 지키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셨어요.

 

김봉래 : 계행이 잘 안 된다는 것은 마음챙김이 없다는 것.

 

권선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살피면 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김봉래 : 그렇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는데.

 

권선아 : 그래서 계정혜, 계의 자리에 사띠(sati), 마음챙김을 넣어서 설명을 하셨고요. 마음챙김과 함께 걷는 것, 마음챙김으로 앉는 것, 호흡하면서 또 마음챙김으로 먹는 것, 그것 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행위에 마음챙김을 가져가는 것,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현존과 온전히 연결되는 것.

 

김봉래 : “I have already arrived(나는 이미 도착해 있다)”

 

권선아 : “I have arrived, I’m home.”

 

김봉래 : 네. 그 단어가 기억이 나요.

 

권선아 : “나는 도착했네. 나는 집이네.” 이런 말씀이신데 또 정토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죽은 다음에 우리가 가는 그런 어떤 다른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호흡으로, 지금 여기의 걸음으로 돌아올 때 그것이 바로 정토라고 하셨죠.

 

김봉래 : “열반으로 가는 길은 없다. 열반이 길이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그런 말씀도 주셨던 것 같습니다만.

 

권선아 : 네. 그런 의미에서 스님의 수행은 불이(不二)의 수행이기도 합니다. 불이의 수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마음챙김의 수행이죠. 지금 여기로 끊임없이 돌아옴으로써 직접적인 통찰이나 직접적인 지각이나 혹은 다른 지각을 통해서 바로 이 자리에서 정토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게 스님 가르침의 핵심이었죠.

김봉래 : 그래요. 우리 권 박사님도 직접 그 비슷한 수행들을 하시고 그런 어떤 결과로써 CCT라고 해서 자비 개발 수행을 지금 보급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권선아 : 저는 스탠퍼드 의과대학에서 만든 자비명상 프로그램인 CCT를 나누고 있는데요, 이것은 ‘Compassion Cultivation Training’ 우리말로는 자비 계발 수행이라고 합니다. 스탠퍼드 대학에 ‘자비와 이타주의 연구교육센터’라고 하는 게 있는데 의과대학 안에, 거기에서 계발된 8주 프로그램이에요. 그런데 불교의 자비를 바탕으로 하지만 현대 심리학 그리고 뇌과학과의 풍요로운 대화를 통해서 나와 타자를 위한 자비수행을 잘 할 수 있는, 과학에 바탕을 둔 어떤 지도를 제시하는 그런 수행입니다. 

 

김봉래 : 자. 그렇게 해서 알아차림, 자비 또 회복 탄력성, 이런 것들을 높일 수 있는 아주 실제적인 방법이 된다 그런 얘기인 것 같은데요, 이거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는 겁니까.

 

권선아 : 아쉽게도 한국에는 아직 CCT 지도자가 저밖에 없어서요. 저희 공감과자비연구소를 통해서 열리는 코스에 참여하실 수 있는데요. 제가 미국에서 CCT를 공부하고 한국에 처음 소개했지만 이것을 CCT 코리아라는 그릇에 담지는 않았고요. 더 자비로운 세상을 향해서 하나의 강물로 흘러간다는 의미로 공감과자비연구소의 홈페이지를 CCT Ocean 그러니까 뭐 CCT의 바다라고 할까요 그렇게 붙였어요. 공감과자비연구소라고 치거나 CCT Ocean 치면 저희 홈페이지로 가실 수 있고 새 수업 소식을 늘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김봉래 : 그래요. 우리 권선아 소장님은 대한불교조계종의 7기 국제포교사이신데요, 어쨌든 또 올해 샤카디타 서울대회가 열리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지금 한국불교가 국제교류 마당에서 그 역할이 커지는 것 같다 이런 생각도 들고 또 한 축에서는 한국불교의 세계화, 이 화두를 어떻게 풀어가야 되느냐 이런 얘기도 하거든요. 박사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권선아 : 저는 개인적으로는 세계화라는 표현을 조금 반성적으로 바라보는 편인데요, 이를테면 틱낫한 스님은 베트남 불교의 세계화를 말씀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플럼빌리지에 오는 사람들을 불자로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고요. 더군다나 베트남 불교를 홍포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물론 어떤 수행의 전통이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잘 맞는 길이 되고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다가간다는 의미에서 이 수행을 알리려고 하는 의도 자체는 귀한 것인데요, 만일 내 것이 혹은 우리 것이 제일 수승하고 그러기에 그것이 세계화되어야만 한다는 뭐 그런 식의 언어 혹은 그런 식의 표현은 열림이나 개방성, 포용, 상호 이해 혹은 존중 이런 것들이 중요시되는 오늘의 시대에는 조금 맞지 않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래서 결국 세상과 중생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우리가 허공계가 닿을 때까지 중생계가 닿을 때까지 세상과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서 편안해지도록 계속해서 수행 정진하고 가르침과 수행을 나누겠다는 그런 의도가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봉래 : 그래요. 자기 것을 이렇게 나누다 보면 자기 것이 좋다는 생각에 남에게는 좀 억압적인 그런 느낌을 줄 수가 있는데 그런 건 절대 피해야 되겠죠. 사실은 금강경에서도 아집, 법집 얘기하면서 특히 법집에 대해서도 굉장히 경계를 하고 있거든요. 내가 이해한 부처님 법이 옳다, 이런 얘기가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는 얘기잖아요.

 

권선아 : 네 동의합니다.

 

김봉래 : 그래요. 이렇게 하다 보니까 시간이 많이 갑니다마는 혹시 종단이나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내용도 있으실까요. 국제 마당에서 활동을 많이 하시다 보면 제도적으로 이런 것이 조금 보완됐으면 좋겠다 이런 거 혹시 있을까요. 

 

권선아 :글쎄요. 제 자신이 지금 내 앞에 닥쳐 있는 다가오는 이 순간을 어떤 생각과 말과 행위로 보살피면서 살고 있는지가 저에게는 더 중요하고요 늘. 그래서 종단이나 정부에게 무슨 말을 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다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 불신이나 적대감, 분노, 혐오, 대립, 분열의 언어 혹은 타자화하는 그런 흐름들이 정말 너무 강하다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종교나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이나 이런 것들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악감정이나 악다구니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틱낫한 스님은 우리 모두에게 사람이든 기관이나 단체든 정부든 그 모든 존재들에게 서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적에게조차도 자비를 갖고 그들을 이해할 길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들조차도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달라이라마 존자도 마찬가지로 티베트를 그토록 억압하고 고통에 빠뜨린 중국을 향한 미운 마음을 절대로 품지 않는 것을 강조하시잖아요. 그래서 이런 것을 실천하는 게 물론 쉽지는 않지만 나와 다른 사람 혹은 우리와 다른 사람을 향한 자비, 이해 그리고 관용, 받아들임은 저희가 정말 불자로서 계속해서 닦고 일궈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자비무적, 되새겨볼 말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시간이 다 되었는데요. 그래도 끝으로 우리 권 박사님 향후 원력과 계획 듣는 것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권선아 : 저는 자비가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꼽히게 하고 싶습니다. 병원에서 학교에서 기업에서 감옥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사는 거리에서 그리고 힘들고 외롭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마음들을 어루만지고 또 치유와 변화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하는 그런 자비로운 벗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은 뭐 저희 공감과자비연구소에서 하는 공부나 수행을 통한 것일 수도 있고요, 제 자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리고 틱낫한 스님께서 전 세계의 11개의 승가 공동체를 일구셨고 또 그런가 하면 누군가의 집 거실 같은 곳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함께 수행하는 그런 풀뿌리 마음챙김 공동체는 1천 개가 넘는데요, 마음챙김의 호흡과 함께 앉고 마음 챙김과 함께 걷고 마음챙김으로 소박한 채식을 함께 나누고 일상의 삶의 모든 순간에 마음챙김의 수행이 깃들도록 서로를 격려하는 진정한 의미의 플럼빌리지 공동체죠. 틱낫한 스님께서는 미래의 부처는 한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올 거라고 하셨는데요, 한 방울의 물이 아니라 하나의 강으로서 가라고 늘 말씀하셨고요, 함께 수행하고 함께 수행의 길을 가는 공동체를 만들 것을 언제나 격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그런 공동체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경이로운 순간들을 깊이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봉래 : 권선아 박사님 오늘 출연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권선아 : 네. 고맙습니다. 제가 감사드립니다.

 

김봉래 : 지금까지 공감과자비연구소 권선아 대표님과 함께 했습니다.

 

권선아 : 네. 여러분 권선아 박사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틱낫한 스님은 자비는 무적이다, 또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가라 하는 공동체를 강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경지가 아니라 그저 수행자라고 하는 평범한 삶이 중요하다 하는 점도 일깨워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귀감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불교방송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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