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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서길수 전 서경대학교 교수

방송 : 2022년 9월 11일(일요일) 저녁 6시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입니다. 한중 수교 30주년의 해를 맞아서 한중 관계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데요, 미국과 중국 두 초강대국 사이에 낀 우리 대한민국이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가 늘 숙제입니다.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중국 관계 특히 동북공정 관련 연구를 해온 학자가 지금은 염불 신앙에 주력하고 있어서 이채를 띠고 있습니다. 정토 신앙과 관련해 10여 권의 책을 내신 분인데요.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서길수 전 서경대학교 교수님 모시고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네. 앞서 소개해 드린 대로 서길수 교수님 불교방송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서길수 교수님 안녕하세요.

 

서길수 : 네 안녕하세요.

 

김봉래 : 우리 서길수 교수님은 서경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경제사를 가르치셨고 또 고구려사 연구에도 매진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고구리.고리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계시고요. 그런데 이제 정년퇴임을 하시고 난 뒤에는 불교 신앙에 매진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10여 권의 책도 내시고 최근에는 왕생집을 또 펴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스튜디오에 모셨는데요. 먼저 BBS 불교방송 청취자들께 인사 말씀 간단히 주실까요.

 

서길수 : 안녕하세요. 전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 전문가로 또는 동북공정 전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마는 불교 쪽에서는 제가 불교방송에는 몇 번 뉴스로는 나갔습니다마는 직접 출연해서 말씀드린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1983년부터 제가 불교를 하기 시작해서 정년퇴직을 13년 전에 하고는 그 때부터는 아주 깊이 있게 좀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맑은나라불교연구소를 만들어서 나름대로 책도 내고 제 공부도 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우선은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서 역사 문제를 검토를 하고 그 뒤에 또 우리 교수님의 불교 신앙에 대해서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고구려사 연구를 통해서 밝히고 싶었던 내용들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 이 특징이 말이죠, 고구려라고 하지 않고 고구리라고 하고 고려라고 안 하고 고리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서길수 : 그건 아주 정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고구려라고 하지 않고 고구리라고 했고 또 고리라고 했는데, 그걸 한문으로 빛날 려(麗)자를 쓴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 당나라 때라든가 송나라 때라든가 진나라 때는 그 당시에는 이게 고구리 말이니까 그것을 한문으로 쓸 때 ‘리’라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나옵니다. ‘려’자가 지금 우리나라 모든 옥편에 다 나옵니다. 옥편에도 나라 이름을 할 때는 ‘리’라고 읽어라. 그리고 아름답다고 할 때는 ‘려’하고 읽어라.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잘못 읽고 있는데, 잘못 읽은 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잘못 읽은 거예요. 그리고 조선시대 그 때도 이러면 안 된다, 실학자들이 얘기를 많이 했고, 그리고 해방 이후 옥편이라든가 사전에 보면 다 고구리.고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역사학자들이 해방되고 나서 잘못해서 국민들에게 잘못 알려준 겁니다. 그걸 바로잡은 겁니다.

 

김봉래 : 역사를 바로 알아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자 한중 수교 30년의 해를 맞아서도 그렇지만 오랫동안 한중의 교류가 있어왔는데 그게 그렇게 대등한 관계라고는 얘기할 수 없었죠. 교수님.

 

서길수 : 대등하지 않았죠.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독립문을 다 가보셨을 거예요. 독립문을 가보면 많은 사람들이 독립문이 일본에서 독립하고 세운 줄 아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이 독립문이라는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전에 세운 겁니다. 그러면 무슨 소리냐. 뭐 때문에 독립, 어디서 독립하자는 거냐, 그 얘기를 보려면 독립문 앞에 기둥이 하나 서 있습니다. 이게 영은문이었습니다. 원래. 그건 뭐냐 하면 명나라나 청나라에서 오는 그러한 칙사들을 맞이하는 왕이 거기 가서 맞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명나라와 청나라와의 관계를 좀 간단히 보면 우리가 처음에 이성계가 사실은 쿠데타를 해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거거든요. 그러니까 인정을 받기가 어려워요. 명나라의 인정을 받기가 그래서 나라 이름을 조선하고 그 다음에 자기의 고향이던 화령이 있어요. 두 개를 올려서 어떤 걸 쓰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조선이라고 써라라고 해서 조선을 쓴 겁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 명나라와의 관계는 아주 철저한 자발적 사대주의의 극치를 이루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걸 중국이라고 그랬죠.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국이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잘 알듯이 위촉오, 한나라, 진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 청 다 한 글자씩이죠. 이게 나라 이름이에요. 중국이라는 것은 자기들이 교만하게 동서남북은 다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이렇게 다 오랑캐다. 이 자나 적 자나 만 자나 다 오랑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만 가운데 문화민족이라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고,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는 사대를 하기 위해서 중국이라고 높인 거죠.

 

김봉래 : 아니 그 쪽에서도 스스로를 중국이라고 불렀던 거죠.

 

서길수 : 중국이라고 하고 그렇게 중국이라고 부른 것 자체가 사대였고, 그리고 청나라 때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굴욕과 항복. 그래서 아주 굴욕적인 사대주의입니다.

 

김봉래 : 어쨌든 지금 중국은 G2로서 패권국가로 나아가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런 우려가 많거든요. 그래서 그런 틈바구니에서 미국과 중국 초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굉장히 걱정이 되는 그런 상황 아니겠습니까.

 

서길수 :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가 미국이나 또는 저는 중국이라고 하지 않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줄여서 중공이라고 합니다. 미국이나 중공이나 이 두 나라는 다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나아가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쪽 편을 들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어요. 그랬을 때 우리는 우리 이익에 맞는 그러한 주장을 할 필요가 있어요. 저는 역사학자니까 동북공정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동북공정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갖다가 고조선 그 다음에 부여, 고구려, 그리고 발해 것을 다 빼앗아갔거든요. 그런 것을 갖다가 너희들이 이러니까 우리는 너희들과 가까워질 수가 없다 이렇게 얘기해야 되고, 미국에다도 이런 일이 있어서 너희들 가까이 하지만 저쪽에서 중국에서 사드 같은 건 문제가 있을 때 너희들도 우리 편을 들어줘야 하고, 양쪽에 다 정확하게 우리가 우리 요구를 하면서 해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지금 우리가 하나 중요하게 봐야 될 것은 북한이 멸망하면 남북통일이 된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북한이 멸망하면 중국이 20분 안에 압록강, 두만강 건너옵니다. 그리고 이미 동북공정에 의해서 이게 자기 역사로 다 돼 있습니다. 평양까지는. 그러면 우리는 미국이 들어가겠죠. 그리고 또 러시아, 일본이 들어왔을 때 그 쪽에서는 옛날 고조선 때부터 평양은 중국 거였고 그 다음에 고구려 때도 자기의 역사였으니까 이건 우리 땅이다라고 주장하고 나온 것이 동북공정의 목적입니다.

 

김봉래 : 자. 그러면 역대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는데 실질적으로 현대사회에 들어와도 엄밀히 보면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가 이렇게 대등하다고만 얘기하기는 좀 어려운 상황이네요.

 

서길수 : 사실은 우리가 80년대 90년대는 단군 이래로 우리가 처음으로 중국한테 큰 소리 치던 때였어요. 그런데 그 때 우리가 진짜 잘하고 남북 간에 같이 대응을 했더라면 그걸 유지할 수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야금야금 동북공정을 해서 다 침투를 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앞에 말했던 우리는 단군조선이다 이 얘기하는데 지금 중국에서는 자기 역사입니다. 국사입니다. 고구리 자기 국사입니다.

 

김봉래 : 어쨌든 이제 말하자면 평등한 관계는 아니고 그런 속에서 그러면 어떤 외교를 해나가야 하는 건데, 거기에서 좀 여러 가지 좀 어려움이 있겠어요.

 

서길수 : 근데 그 부분을 우리는 우리가 외교적인 카드로 이 역사 문제를 왜 안 쓰는지 모르겠어요. 중국에다는 너희들이 우리 역사를 이렇게 하니까 국민들이 모두 너희들 싫어하는 거 아니냐. 사실은 우리가 80년대 이후 90년대 중국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야말로 신천지 노다지가 나오는 나라로 해서 그래서 나이 든 사람은 중국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왔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런데 동북공정이 일어난 2002년 이후에 급격히 사이가 나빠집니다. 이 원인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김치 문제라든가 한복 문제라든가 이런 문제들이 바탕은 뭐냐 하면 동북공정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우리가 직시를 하고 동북공정 문제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해야 돼요. 먼저. 왜냐하면 그 당시에 우리가 경제적인 이득을 보기 위해서 역사를 빼앗기면서도 아무 소리 못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쉬쉬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히 우리의 입장을 얘기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고, 그런 부분을 얘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김봉래 : 동북공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서길수 : 동북공정은 우선은 현상을 알아야 돼요. 현황은 뭐냐 하면 교과서는 물론 그 다음에 현지에 네이버 다음 같은 바이두라는 데 들어가 보면 고조선, 고구리, 부여, 그거 다 자기 역사로 해서 검색하면 다 그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쪽은 한복? 그거 다 우리 역사야. 그래서 북한, 평양 이북은 자기 역사로 이미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 이것은 훔쳐 간 것이다라고 우리가 분명히 얘기해야 돼요. 그런데 20년 동안 안 해버리니까 이게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거 아주 위험한 겁니다.

 

김봉래 : 지금 우리가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우리 영유권임을 강조하고 세계적으로도 홍보를 많이 하는데 동북공정에 대해서는 그런 노력이 매우 약하다 이런 말씀이시네요.

 

서길수 : 두 가지만 예를 들게요. 하나는 제가 정년퇴직하고 산에 들어가서 3년 동안 불교 공부를 하고 내려와서 불교만 했어요. 그랬는데 2017년에 시진핑이 트럼프한테 한국은 중공의 일부다라고 얘기를 했어요. 근데 아무도 사람들이 아무 소리 안 해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아베가 한국은 일본의 일부다라고 하면 가만히 있었겠어요. 이게 다 아직도 사대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이걸 분명히 무슨 소리냐, 아니다라고 외교적으로 얘기하고 다 해야 돼요. 그런데 그게 이제 두 번째는 당연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놨으니까.

 

김봉래 : 그러면 지금 윤석열 대통령 정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제대로 대처하고 있다고 보시나요.

 

서길수 : 아니요. 전혀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런 부분에 신경을 쓸 수가 없어요. 지금. 신경을 안 쓰고 있어요. 아예.

 

김봉래 : 왜 그럴까요.

 

서길수 : 역사다 사상이다 외교 문제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저는 단 한 번도 뉴스 나온 적도 없고 생각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이 분들 금년 3월 1일 날 대회를 하면서 발표를 하면서 동북공장 거기 각 후보자들한테 다 띄웠어요. 이렇게 심각하다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 열어보지도 않고 윤석열 캠프 같은 데는 받지도 않고 되돌아왔어요.

 

김봉래 : 아. 그렇군요.

 

서길수 : 그렇습니다. 역사의식이 지금 이렇다는 겁니다.

 

김봉래 : 어떻게 보면 중국과 우리와는 오랜 유대 관계도 있지 않습니까. 특히 불교적인 교류를 봐도 그렇고요.

 

서길수 : 문화적으로 봐서는 절대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가까웠죠. 우리가 고구리나 신라 삼국시대 때 불교를 들여왔고 또 고려시대 때는 우리가 천태사상이라는 걸 전해줬습니다. 그 쪽에서 법난 때문에 다 없어져서 그렇게 가까이 했는데,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거의 500년씩 우리는 안정을 누리는데 거기는 굉장히 싸웠어요. 그 정치적인 흐름에 따라서 우리는 많은 영향을 받았죠.

 

김봉래 : 사실 현대에 들어와서도 1995년에 한·중·일 불교우호교류대회가 중국에서 처음 제1회 대회가 열리면서 한·중·일 3국 간의 황금유대, 이른바 조박초 중국불교협회 회장이 내세웠던 그런 황금유대가 다시 시작이 됐었는데, 요즘에 와서는 상당히 중국 쪽이 좀 고압 쪽으로 나가는 거 아닌가 이런 느낌이 좀 있어요.

 

서길수 : 그러니까 조박초 회장은 중국불교협회 회장은 그야말로 공산당 시대부터 오픈하기 전부터 회장이었잖아요. 그래서 국가의 이득을 위해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 때만 하더라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본과 한국의 도움이 필요했었죠. 그런데 이제는 G2가 되어가지고 미국과 맞붙게 됐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본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김봉래 : 작은 국가, 소국은 얕보는 거죠.

 

서길수 : 그렇습니다. 뭐 기본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래요.

 

김봉래 : 그렇군요.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서길수 전 서경대 교수님 모시고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교수님,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있으세요. 어떻게 보면 역사에서 신앙으로 이렇게 무대를 옮기셨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불교에 관심이 많으셨는지요.

 

서길수 : 불교에 관심을 가진 지는 오래됐습니다. 1983년부터 제가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김봉래 :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서길수 : 그 때 당시 저는 천주교 고등학교 나오고 기독교 대학 나오고, 그리고 공자의 경제사상, 율곡의 경제사상, 유교를 하고 다양한 사상을 섭렵을 했어요. 그러다가 83년도에 ‘불교사상’이라는 잡지가 일반 잡지가 처음으로 나왔어요. 불교 쪽에서. 그것에 그 당시에 (성철스님의)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 다음에 탄허 스님의 이야기에 굉장히 매료됐어요. 제가. 그러다가 1992년부터는 직접 수행을 시작을 했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염불 신앙, 아미타 신앙, 정토 신앙에 관심이 많은 어떤 이유가 있었나요.

 

서길수 : 그 때는 한 8년 동안 관법을 했어요. 관법을 하다가 화두도 해보고 쭉 했는데, 선정에 들어가지지 않는 거예요. 내가 해보니까.

 

김봉래 : 아. 다른 수행법은.

 

서길수 :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근기에 따라서 수행법을 선택을 해야된다.

 

김봉래 : 자기한테 맞는 것.

 

서길수 :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승기신론을 보면 수행법은 두 가지예요. 근기가 높은 사람은 깨달아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여기서 그냥 소위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살았을 때, 안 그랬을 때는 극락에 가서 거기는 불퇴전이니까 다시 육도 윤회를 하지 않고 그 쪽에 가서 열심히 해가지고 깨달음을 얻는 것, 이 두 가지인데, 내가 실제로 정년퇴직 가까이 와서 보니까 내가 이승에 깨달아서 확철대오 할 자신은 없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내가 다시 윤회할 수는 없고, 그러면 선택은 극락에 가는 길밖에 없는 거죠.

 

 

김봉래 : 그래요. 그런데 그런 것이 자칫 현실과는 조금 거리를 두는 그런 경향은 없습니까?

 

서길수 : 현실이라는 그런 측면은 우리가 생과 사 문제에 있어서 저는 철학적으로 많이 공부를 했기 때문에 철학과 종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 많이 고심을 했어요. 거기에서 하이데거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철학이 끝나는 곳에 종교가 시작이 된다.

 

김봉래 : 철학이 끝나는 곳에 종교가 시작이 된다.

 

서길수 : 그러면 우리가 먹고 살고 잘 지내고 도덕, 철학, 이런 부분은 살아서 하는 거지만 결국 그것이 죽은 뒤에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거냐. 그래서 죽음이라는 목표를 뒀을 때는 이미 종교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종교라는 것이 마지막에 가서는 반드시 종교 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지 철학 생활을 해가지고는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선택을 했을 때 다음 생을 생각했을 때 나는 확철대오가 안 됐을 때는 보험을 들어야 될 거 아닙니까. 어떻게든지 내가. 그래서 정토를 하게 된 겁니다.

 

김봉래 :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정토신앙이 더욱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실 텐데, 염불 신앙, 아미타 신앙의 장점은 어떤 것이라고 보세요.

 

서길수 : 우선은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내가 참선을 해서 깨달을 수 없다고 그러면 길은 이것밖에 없는 거죠. 다시 말하면 내가 근기가 약했을 때는.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신앙은 타력 신앙과 자력 신앙이 있잖아요. 그런데 불교에는 자력과 타락이 동시에 있는 참 특이한 종교예요. 그런데 자력으로 안 될 때는 타력이에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자들이 이 두 개를 서로 배치되는 걸로 알아요. 그러나 이건 상호 보완적인 겁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내가 왕생집을 보면 젊고 힘이 있고 했을 때는 주력도 하고 참선을 하지만 나이가 들면 대부분 옛날 일반인들도 나이가 들면 채식하고 염불을 한다. 그건 일반적인 상식으로 지금까지 내려왔던 것입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지금 왕생집 이야기를 하셨지만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렇게 왕생의 사례들을 모은 왕생집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잘 없었다고요.

 

서길수 : 네 처음입니다.

 

김봉래 : 그래서 <한국왕생집 - 극락에 간 사람들>을 펴내셨는데, 보니까 굉장히 오랜 기간 사례를 모으셨던 것 같아요.

 

서길수 : 제가 1992년부터 여러 가지 관법도 하고 하다가 2008년쯤 되니까 정년퇴직이 가까우니까 내가 그렇게 해서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염불로 돌아섰어요. 그런데 그 때 나한테 가장 희망을 주고 도움을 줬던 게 왕생집이었어요. 그건 중공에서 나온 거죠. 거기서 나온 건데, 하청 스님이 번역을 한 것인데, 그걸 쭉 읽어보고 이런 사람들이 갔어. 그럼 나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잖아요.

 

김봉래 : 그렇군요. 그런데 이 분이 왕생했다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가 있습니까.

 

서길수 :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왕생 사례를 연구하는 데 어떤 기준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기준은 결국은 딱 한 가지입니다. 그건 경전입니다. 그러면 정토경전이라는 것은 세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그러면 이 세 가지에서 어떻게 하면 간다고 그랬는가. 정토 하는 사람은 제일 첫째 뭘 알아야 되냐 하면 정토가 뭐냐, 극락이라는 데가. 그리고 왜 가려고 그러느냐.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 가느냐는 거죠. 그러니까 좋다. 모든 사람이 극락 가자 그러니까 기독교인이 천당가자고 하는 것처럼 다 극락 가자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극락을 어떻게 하면 가는가 하는 것을 제가 봤어요. 세 경전이 조금씩 달라요.

 

김봉래 : 예. 조금 다르죠.

 

서길수 : 그런데 아미타경은 굉장히 셉니다. 작은 공덕으로는 갈 수 없다고 그랬고, 일심불란을 해야 되고. 그러면 선정에 들지 않으면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을 상품상생이나 상품을 가는 사람을 위한 그러한 것이 아미타경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무량수경에는 세 단계가 딱 나눠져요. 이렇게 하면 상품 가고 이렇게 하면 중품 가고 이렇게 하면 하품 간다. 그래서 이 책에다 제가 그걸 다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기준이 이렇다. 그런데 이제 오역죄는 갈 수 없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관무량수경에는 오역죄도 갈 수 있다고 그랬어요. 그야말로 하품하생도 갈 수 없는 사람한테 희망을 주는 그런 얘기죠. 그런 걸 전체적으로 봐서 판단을 했습니다.

 

김봉래 : 왕생의 사례들을 전부 다 소개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3박 4일이 걸려도 어려울 테니까요, 교수님께서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분이 계실까요. 최근에 연관스님 돌아가신 부분도 좀 있던데요.

 

서길수 : 근대에 들 어와서 보면 해인사 대율사인 자운스님, 대구 염불선의 수산스님, 그 다음에 정토삼부경으로 정토 법문을 여신 청화스님 등 많습니다. 최근 곡기를 끊고 8일 만에 왕생하신 연관스님 이런 분들이 많이 있는데, 이런 분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제가 이 책은 통일신라시대 때, 그 다음에 고리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이렇게 쭉 나눠서 편집을 했어요. 사실은 상하권이어야 되는데 이번에 합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조선시대 때 아주 특이한 스님이 계셔서 소개를 좀 할까 그래요. 용담 대선사인데 1762년에 왕생을 하셨는데, 이 스님은 청허 휴정, 그 다음에 편양 언기 법맥을 이은 아주 고승이에요. 그래서 (상월을 포함해) 이런 세 분의 스승을 모셨고, 그리고 그야말로 그 당시에 참선에 대해서는 난다긴다 하는 그런 스님이에요. 거기에 보면 선과 교에 신묘에 이를 정도로 못함이 없었고 강설을 하면 찾아오는 무리가 많아서 선상(禪床)이 부러질 정도로 하는 그런 고승 대덕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스님이 나이가 딱 들어서 뭐라고 그러냐 하면 “깊이 품은 업보 억지로 토해 대중에게 알리노니”, 이제 마지막에 한 겁니다. “강단에서 거짓으로 놀리고 현묘하다 기이하다 설했는데, 경전을 보는 것도 젊은 날에는 허락되겠지만 머리 희면 도리어 염불이 마땅하네” 그렇게 얘기를 하셨어요. 그리고 염불을 마지막에 하셔가지고 “구품 연대 자리에 먼저 올라 아미타블 옛 주인 우러러 마주하리라” 하고 마지막 가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대부분 처음에 가서 염불을 배웁니다. 염불을 배우고 나서 주력도 해보고 뭐 참선도 해보고 그러다가 말년에는 결국에 보험을 들어야 되니까 염불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도로아미타불이라고 합니다. 결국은 도로 아미타불 해서 극락가게 된다. 그런 대표적인 예로 제가 용담 스님 예를 하나 들었습니다.

 

김봉래 : 그래요. 요즘에 탈종교화 시대라고 하거든요. 출가자 수 감소, 신도 수 감소해서 또 한국불교도 위기다 이런 이야기도 하는데, 교수님께서는 이런 현상에서 어떤 말씀을 해 주고 싶으신지요.

 

서길수 : 한국불교만 위기가 아니라 전 종교가 위기입니다. 결국은 말하면 사람들의 종교성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조금 더 대표적인 예를 들어서 제가 3년 전에 일본을 갔더니 책이 하나 나왔어요. 귀하의 마을의 절이 사라지고 있다. 이미 40%가 사라졌어요. 우리나라 절들도 보면 거의 지금 다 1인 절들이 스님 한 분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상좌가 없습니다. 숫자가 그러다 보니까 딱 그렇게 가는 겁니다. 지금. 그러면 거기서 솔루션을 제공을 했어요. 그 스님 한 분이. 첫째는 전국화. 그리고는 소위 죽은 자를 위한 불교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불교, 이걸 부르짖었어요. 그러면 결국 결론은 뭐냐. 원칙적인 원래 불교로 돌아가자. 그래서 저도 3년간 정년퇴직 하고 산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나서 그 결과를 가지고 1년에 한 번 정도 강의를 해봤어요. 불교의 기본 강의를. 그런데 뭐냐 하면 젊은 사람들은 논리예요. 그런데 불교처럼 논리고 과학적인 것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 불교가 중국을 통해 들어오면서 완전히 형이상학화 되어 버린 겁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선사들의 얘기만 부르짖고 있는 겁니다. 절대 그런 건 젊은 사람한테 먹혀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럼 불교란 무엇인가 딱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딱 집어줘야 돼요. 학교에서도 내가 딱 보고 기독교 믿는 사람은 다 손을 드는데 불교 믿는 사람은 많으면 한두 명 두세 명. 그래서 한 명이 손을 들어서 반가워서 물었어요. “오늘 어디 절에 가느냐” 하니까 “아니 우리 어머니가 절에 다닌다”고 그런 식입니다. 그건 그럼 왜 그러느냐. 저는 교육 시스템이 잘못됐다고 봅니다. 불교에는 교육 시스템이 없어요. 언젠가 선승들이 책은 보지 말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불교가 뭔지 모르고 그냥 화두만 잡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스님들은 그렇게 해서 확철대오를 하면 돼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99%의 신도들은 어떡하라는 거죠? 그래서 실제로 절에 가서 사생관을 가지고 죽음에 대해서 논의하고 그걸 어떻게 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그런 절들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와 좀 비교를 하면 기독교는 초등학생 반, 중학생, 고등학생, 또 대학생 반 사람이 초등학생 가르치고 부모가 데리고 거기다 집어넣는데, 우리는 엄마 아버지가 다니다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니까 젊은 애들이 안 가봤으니까 안 가는 거예요.

 

김봉래 : 맞아요.

 

서길수 : 그래서 교육 시스템을 제대로 해서 하지 않으면 참 어렵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봉래 : 자. 이렇게 하다 보니까 마무리될 시간인데요, 끝으로 우리 교수님 앞으로의 원력 계획 듣는 것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쳐야 될 것 같습니다.

 

서길수 : 저는 고구리 연구에서는 앞으로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 이름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이것을 해야 되고, 두 번째는 동북공정을 우리가 어떻게 해서 독립운동을 해서 찾아 뺏긴 역사를 찾을 것인가, 그 다음에 불교에서는 우선 내 자신이 극락을 가는 게, 나이가 내년이면 80입니다, 그게 아주 중요한 목표입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서길수 : 네 안녕히 계세요.

 

김봉래 : 지금까지 서길수 전 서경대 교수님과 함께했습니다.

 

김봉래 : 여러분 서길수 교수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교수님께서 정말 우리 역사를 찾아야 한다 강조를 해 주셨고요. 또 삶과 죽음의 문제 놓치지 말고 우리가 정진해야 되겠다 이런 말씀도 주셨습니다. 추석 연휴인데요, 늘 부처님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시간 보내셨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불교방송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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