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김진병 만해한용운연구소 소장

방송 : 2022년 6월 5일(일요일) 저녁 6시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의 김봉래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요, 젊은이들을 위한 포교 활동은 상대적으로 적지 않느냐 하는 반성이 있습니다. 탈종교화 경향 속에서도 진흙 속의 연꽃처럼 불교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에게 손길을 내밀어야만 우리 불교의 미래가 더 밝아질 것입니다. 그래도 그동안 꾸준히 활동해 온 선배들 덕분에 후배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요,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욱 널리 퍼져서 더욱 더 안락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전주룸비니불교학생회 출신으로 지금은 만해 한용운 스님의 삶과 사상을 계승하고 실천하는 만해한용운연구소 소장을 맡고 계신 김진병 소장님 모시고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네. 앞서 소개해 드린 대로 오늘은 만해한용운연구소 김진병 소장님을 불교방송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김진병 소장님 안녕하세요.

 

김진병 : 안녕하세요.

 

김봉래 : 오늘 소장님 모신 것은 크게 두 가지 사안을 여쭙고 싶어서입니다. 물론 만해 한용운 스님에 대해서도 여쭙겠습니다마는 얼마 전에 전주룸비니불교학생회 50년사가 발간이 됐어요. 그래서 50주년 기념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주셨기 때문에 관련 이야기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먼저 BBS 불교방송 청취자들께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병진 :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받은 김진병입니다. 코로나가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또 세상에 좀 더 편안한 삶이 앞에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 사이 시골에 내려가서 보면 가뭄에 시달리는 어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언제 어느 때나 할 것 없이 한 쪽에는 편안함이 있는가 하면 또 한 편에는 불편함이 공존하고 있구나라고 하는 것들을 부처님 공부를 해오면서 지금이나 그 당시나 다르지 않구나라고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분들에게 좀 더 편안함을 제공해 주는 것이 우리 불교가 해야 될 중차대한 과업이 아닌가 이런 인사 말씀으로 맞이하겠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이야기하듯이 세상에는 괴로움이 가득 차 있지만 이러한 괴로움을 떠나서 즐거움을 우리가 누릴 수 있다 하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가르침을 부처님께서 해주셨는데요, 우리 김진병 소장님께서는 아주 청소년 시절부터 이렇게 불교와 인연이 있으셨나 봅니다.

 

김진병 : 아마 당시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가 1972년인데요, 그 당시에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의 친구들끼리 철학서클이라고 하는 것을 7, 8명이 구성을 해서 공부를 좀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시내에 보니까 포스터가 붙어 있었어요. 불교사상 강연회라고 하는 게 전주 시민문화관에서 개최한다고 하는 포스터를 보고 친구들끼리, 지방에 있으면서 저런 선생님들을 우리가 만나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찾아가서 처음으로 김동화 박사님의 강연을 들은 게 인연이 되어서 결국은 그 당시에 대불련(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선배님들이 저희 몇 명들을 모아서 불교학생회를 구성하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참여하면 어떻겠느냐, 이런 제안이 있어서 저희가 흔쾌히 참여하게 되어 줘서 그 해 10월 1일 날 전주 룸비니불교학생회라고 하는 게 창립이 되게 됐습니다. 그 때 사상강연회가 있었고 한 일주일 후에 전북대학교에서 개최한 종교 심포지엄이라고 하는 게 또 있었어요. 그래서 아마 두 모임에 참가했던 고등학생들, 그 당시에 모았을 때 23명이 돼서 그게 창립의 모태가 됐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그리고 저희가 그 다음 주부터 바로 법회를 보기 시작했었습니다.

 

김봉래 : 네. 그 때 당시가 그러면 소장님께서 고등학교 1학년 때시잖아요. 3기 회장으로 돼 있으시더라고요.

 

김진병 : 그 당시에 제가 아파가지고 쉬게 됐어요. 그래서 3기로 됐는데, 1기 선배님은 한 분 계셨어요.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2기가 창립의 중심이 되는 그런 기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김봉래 : 원래는 2기로 활동을 많이 하셨어야 되는데 주로 3기에 활동을 하셨다 이런 말씀이시고. 그래서 말씀 나오신 대로 지금 ‘전주룸비니불교학생회’가 공식 명칭인데 그 연원을 잠시 말씀을 해주셨지만 역사가 올해로 꼭 50주년이 된 거죠.

 

김진병 : 그렇습니다.

 

김봉래 : 그 때 창립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그런 것들이 있었겠습니다.

 

김진병 : 그런데 그 당시에는 어려움보다는 저희들 스스로가 법사님들을 매주 토요일 날 오후 2시에 법회를 봤었기 때문에 저희들 스스로가 지역사회에 있는 거사님이나 스님들을 찾아뵙고 법회를 쭉 이어나갔어요. 그리고 필요로 하는 도움이 있다고 한다면 절에 찾아가서 열심히 스님들께 도와주십사라고 말씀을 드렸고, 그렇게 했을 때 누구 한 분도 거절해 보신 분이 없었어요. 그만큼 따뜻한 배려 속에서 저희가 잘 성장해 왔다고 하는 것들을 이 자리에 빌려서도 다시 한 번 감사드려야 될 그런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지금 법회를 고등학생들이 스스로 조직해서 진행을 했다하는 부분이 요즘으로 봐서는 조금.

 

김진병 :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희들은 그 당시에는 인쇄물이나 책자라든가 귀했었거든요. 그래서 기껏해야 회관에 마련되어 있는 게 등사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철판 위에다가 등사지 놓고 저희가 철필로 이렇게 다 긁어서 인쇄해서 나눠보고 그러던 시절이었습니다.

 

김봉래 : 그렇죠. 법보시하고 경전 읽고.

 

김진병 : 그렇기 때문에 아마 거사님들과 스님들께서 흔쾌히 다 잘 도와주셨습니다.

 

김봉래 : 그러면 그 때 당시에 이렇게 크게 외호가 되었고 후원이 되었던 스님과 또 거사님 보살님들이 계실 거 아닙니까.

 

김진병 : 역시 가장 큰 외호 조직은 역시 금산사였습니다.

 

김봉래 : 아. 금산사 17교구 본사죠.

 

김진병 : 그래서 전주에 불교회관이라고 하는 게 마련이 되어서 그 공간을 저희들이 쓸 수 있었다고 하는 게 가장 큰 거고.

 

김봉래 : 네. 전북불교회관.

 

김진병 : 시간만 되면 저희가 교통도 여의치 않지만 금산사에 열심히 찾아가서 당시 총무스님을 맡고 계시던 도영스님께 도움을 요청을 하면 도와주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김봉래 : 나중에 조계종 포교원장을 하시는 도영스님. 그 후에 또 주지를 하셨던 월주스님, 총무원장 하셨던 월주스님께서도 아마 많이 도와주셨을 것 같아요.

 

김진병 : 네 그 이후에 쭉 저희 아마 지역사회에서는 큰 버팀목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김봉래 : 그러면 아까 김동화 박사님 말씀도 하셨지만 주로 법문은 어떤 분들이 해 주셨나요.

 

김진병 : 법문은 가장 대표적으로 저희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분이 전북대학교의 사무총장으로 와 계시던 최조산 거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정말 모든 시간을 내셔서 법회 또 경제적인 지원도 해 주시고, 또 지역사회에 있는 이동호 박사님이라든가 청산 거사님 그리고 스님들로서는 정혜사에 계시던 지현스님 이러한 스님들이 저희들의 법회들을 쭉 이끌어 주시고 그랬습니다.

 

김봉래 : 그러셨겠네요. 책에도 보면 동문들의 활동상이 많이 나와 있거든요. 또 사회에 진출해서도 꽤 성공하신 분들도 계시고요. 물론 우리 소장님도 대학에서 교수로 정년을 하셨지만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거예요.

 

김진병 : 네. 저희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불교를 만나서 이렇게 지금 저희 선후배들을 쭉 살펴보면 불교라고 하는 인연이 평생의 삶에 그대로 녹아 있구나라고 하는 것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김봉래 : 아. 불교 인연이 평생 녹아 있다.

 

김진병 : 그래서 출가하신 분들이 여러분 계시고, 저희 같은 동기였던 지엄스님은 아마 서울에 암자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중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시고 티베트 불교에 대한 책들도 서너 권 출판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후배들도 여러 명 출가하신 분 계시고요. 또 보니까 불교단체 종무원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이 꽤 있어요. 현재 조계종단의 종무원으로 계시거나 또는 지역사회 본사 절에서 종무원으로 활동하시는 분도 계시고 언론기관에서 기자로 활동을 하시거나 그 주변에 사업을 관련해서 하시거나 또는 토목이나 건축하시는 분들은 사찰 건축 설계를 하거나 또는 건축 공사를 맡아서 하시는 선후배들이 있으십니다. 그들이 역시 결국은 불교라고 하는 주변과 멀리 있지 않고 평생 불사를 위해서 노력하고 계시구나 하는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김봉래 : 그렇게 당시에 열심히 활동했던 그 경험들이 소중하게 축적되고 나눠져 있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런 말씀이신데, 앞으로도 쭉 더 활동을 더 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김진병 : 그래서 저희가 현재 불교학생회는 지속되고 있지 못하지만 그동안 후배들하고 만나서 얘기할 때마다 이게 좀 우리가 다시 한번 재활성화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논의 끝에 2016년부터 저희가 봄·가을에 한 40명 정도 모이면서 템플스테이를 꾸준하게 다녔어요. 그러면서 50주년 행사를 기획해서 지난번에 추진했었던 거고요.

 

김봉래 : 그렇군요. 그러니까 지금은 파라미타청소년협회에 이렇게 흡수 통합이 된 건가요.

 

김진병 아마 그게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청소년 불교학생회라고 하는 게 70년대 80년대만 하더라도 전국에 룸비니불교학생회라는 게 각 학교별로 꽤 많이 있었어요. 그리고 청소년 교화연합회라고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어렸을 때 김어수 거사님께서 금산사에 오셔서 서울에 청소년교화연합회 학생들과 합동으로 수련대회도 하고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단위 조직이 소위 말하면 전국 단위 조직화라고 하는 쪽으로 가면서 교육청하고 연합해서 단위학교 조직으로 이렇게 가서 단위학교의 동아리로 끌고 가다 보니까 지금 각 지역에 있는 불교학생회 조직이 사라지게 된 거다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시대의 변화도 있었죠. 입시 위주의 교육이라든가 또는 학생과 교사는 그런 활동을 통해서 자기의 어떤 이점을 챙길 수가 있었죠. 선생님께서는 승진 연수를 취한다든가 학생은 봉사활동 점수를 취하는 그런 이득이 있었는데 이게 교육부의 정책이 2020년 가까이 오면서 또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마 유명무실한 조직의 형태로 바뀌면서 유야무야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김봉래 : 그러니까 파라미타청소년협회 활동도 많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얘기가 되겠네요.

 

김진병 : 그렇게 봐야 합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그래도 1970년대에 이렇게 고등학교 불교학생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것은 그것이 어떤 인연 때문에 그렇게 가능했다고 보시는지요.

 

김진병 : 이구동성으로 한 얘기들이 저희 학생들이 모여서 토론하는 게 제일 인상 깊었다 그런 얘기들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저희가 연말이면 보리수라고 하는 잡지를 한 200쪽짜리를 만들었는데, 그때 학생들이 시나 수필 논문 같은 것도 싣고 또 학생들의 공통 관심사를 앙케이트 형식으로 쓰잖아요. 그런 쪽들에 있어서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런 얘기들을 많이 나누더라고요.

 

김봉래 : 그렇죠. 학창시절에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같은 동년배 또 선후배들끼리 인생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고 사상적 교류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은 요즘에는 대학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는데 당시는 굉장히 조숙했나 봅니다.

 

김진병 : 아마 그게 당시하고 지금하고의 차이라고 볼 수가 있겠고요. 그 당시에는 자료들이 많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쪽에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간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김봉래 :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만해한용운연구소의 김진병 소장님과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 김진병 소장님께서는 전주룸비니불교학생회 활동을 하시고 또 대학에 진학해서는 자연스럽게 대불련 활동에 집중을 하신 거죠.

 

김진병 : 네네.

 

김봉래 : 한양대.

 

김진병 : 그렇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불교학생회에 가입을 했었고 또 열심히 활동도 했었죠.

 

김봉래 : 보니까 한양대 불교학생회, 또 불교동문회가 굉장히 결집력이 좋은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그 결집력이 좋은 한 가운데에 제가 봐서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계신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봤거든요.

 

김진병 : 아마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1972년에 아마 이게 대불련과 함께 했었습니다만 그 주역의 역할을 하신 분이 저희 불교학생회 선배이신 전보삼 선배님이 계셨었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추세는 저희 한양대학교 불교학생회에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매년 3월 1일이면 망우리 공원에 모여서 만해스님을 참배하는 그런 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김봉래 : 아주 전통이고요. 또 만해스님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는 책도 발간해서 법보시를 또 많이 하셨지 않습니까.

 

김진병 : 네. 그 당시만 하더라도 70년대에 저도 불교학생회 회장을 역임했었습니다마는 그 당시에는 사상 강연을 불교학생회에서 봄·가을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만해 한용운 스님을 적어도 4년 동안 두세 번 이상 강연의 주제로 선정을 해서 이기영 박사님이라든가 서경수 교수님이라든가 또는 김관호 선생님이라든가 이런 분들을 초빙을 해서 저희가 사상 강의를 진행한 바가 있습니다.

 

김봉래 : 그래요. 어떻게 보면 젊은 시절에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던 그 힘이 평생의 어떤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런 생각까지 좀 들거든요.

 

김진병 : 그것은 자연스럽게 된 것 같습니다. 저희 고등학교 때 모였던 친구도 10명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모임을 결성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혼자씩 참여를 했지만 결혼해서 부부가 참여를 하고 또 자녀가 태어나고 나서는 자녀들도 함께 참여해서 자연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스며드는 그런 조직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고요. 대학교 활동 했던 불교학생회 조직도 동문회 활동, 그 다음에 같은 연배 또래 모임에서도 가족 간의 그런 유대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김봉래 : 그래요. 우리 김진병 소장님께서는 대학에서 후진 양성을 하시다가 정년 퇴임을 하셨는데, 그래도 지금은 만해한용운연구소 소장으로 만해스님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만해한용운연구소 사업들도 간단히 이런 기회에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진병 : 저도 2020년에 퇴직을 했는데 한 5년 전부터 같은 법우들끼리 퇴직하고 어떻게 살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냐 이런 토론을 여러 번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같이 법우들끼리 나온 얘기는 우리 스스로가 그동안 입은 가피를 되돌려주는 그런 회향의 시대가 아닌가라고 하는 점에 의견이 공통적으로 모아졌어요. 그래서 저희들끼리 퇴직을 하면 만해 한용운 연구소를 만들어서 그 일이 조금 더 널리 파급되는 그런 역할을 해야되지 않겠는가라고 도달하게 돼서 저는 퇴직하자마자 그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그러면 연구소의 소장이시니까 거기 조직도 있고 추진사업 같은 것도 있으실 텐데요, 중점적으로 추진되는 일들 소개를 해주신다면요.

 

김진병 : 제일 먼저 했었던 것은 만해 한용운 스님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구축하는 일을 먼저 했었습니다. 그것은 크게 보면 두 가지 갈래로 볼 수 있는데, 만해 한용운 스님의 여러 가지 저작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둘째로는 만해 한용운 스님에 대한 연구자들이 국내에 보면 다른 어떤 연구자들보다도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석박사 학위 논문, 국내외, 그 다음에 만해 스님의 저작물들을 가지고 연구한 연구 논문들, 이런 것들을 총망라를 해보면 2천여 편이 넘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 전체를 데이터베이스를 일단 구축을 했고요. 2차적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저작물들, 온갖 것들을 지금 아카이빙을 하는 사업이 5년 동안 진행될 예정입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뭐 요즘에 곳곳에서 희망이 없다 이렇게 아우성이고 또 곳곳에서 위기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만해스님은 일제강점기에 정말 올곧게 또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독립정신을 실천하신 그런 분이신데, 요즘 뭐 다들 힘들다고 그럽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 한 말씀 주신다면요.

 

김진병 : 역시 힘들다라고 하는 것은 말에 그치고 있습니다. 정말 무엇이 힘든가에 대해서 골똘히 우리가 되돌아보는 그런 마음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힘든 것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안으로부터 오는 게 아닌가. 스트레스도 남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스트레스를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닌가라고 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자문해 볼 필요가 있겠다.

 

김봉래 : 상황 그 자체보다는 그 상황을 어떻게 내가 파악하고 어떻게 대응하느냐 거기에 달려 있다 이런 말씀이신거죠.

 

김진병 : 그것은 결국은 내가 주인으로 잘 살았을 때 고통이 즐거움이 되어줄 수 있겠다라고 하는 본래 불교의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점을. 저도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렵다고 하는 것들을 되뇌일 여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걸 꿰뚫어 보고 자기를 이렇게 되돌아오게 하면 어려움이 어려움이 아니더라라고 하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봉래 : 간단한 얘기지만 실천하려면 어려울 텐데, 지방선거도 막 끝났고 해서 민심이 평가가 됐고 한데, 새로운 정권의 시작점인 그런 시기도 있기 때문에 기대하는 점도 있지만 또 우려하는 점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양면을 보시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는 부분도 한 말씀 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주실 수 있을지요.

 

김진병 : 역시 기대 또는 저희들이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서 푯대가 될 수 있는 중심이 뭐냐 라고 하는 점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세상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움이 앞에 많이 놓여져 있습니다. 아마 가장 큰 어려움은 기후위기가 아닌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들을 나부터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그런 삶이 바르게 잘 사는 삶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김봉래 : 굉장히 큰 화두를 내주신 것 같아요. 저는 약간 작은 문제를 기대하면서 여쭤봤는데 역시 불교의 연기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그것이 같이 이렇게 상호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환경보호 부분도 굉장히 중요한 그런 부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이 어떻게 보면 참 불교적인 철학, 불교적인 사상, 그런 면에서 불교의 역할이 또 중요할 것 같아요.

 

김진병 : 그렇기 때문에 지금 불교와 인연을 맺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앞으로 중요한 주인으로서 역할을 해줘야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 곳에서 말씀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이미 미래에 대한 진단의 해결책은 동양에 있다. 동양 어디에 있느냐, 불교에 있다. 그러면 불교에 어디에 있는 거냐. 그게 바로 나 자신으로 되돌아가면서 내가 구체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내가 매일매일 수련하지 않으면 수행하지 않으면 그런 어려움이 남의 어려움이 아니라 나의 어려움일 수 있다.

 

김봉래 : 그러니까 내가 그냥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바른 생각에 의해서 바른 방향으로 실천에 옮겨야 된다 그런 말씀 아닙니까.

 

김진병 : 네.

 

김봉래 : 그런데 요즘 불교가 젊은이들에게도 상당히 친숙해진다 이런 얘기가 있거든요. 얼마 전에 제가 국제도서전에 다녀왔는데 젊은 친구들이 굉장히 불교, 또 불교 책에 대해서 특히 사상, 철학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그런 얘기를 해서 제가 좀 놀란 적이 있거든요.

 

김진병 : 아마 그런 부분들은 이미 세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BTS의 노래 가사를 보면 그런 현상을 잘 설명해 주는 게 아닌가. 그래서 너 자신을 사랑하라라고 하는 것들도 다름 아니잖아요. 나를 누가 사랑해주겠습니까. 나를 내가 존중하고 내가 귀하다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천명하지 않는 한 나를 귀하게 여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봉래 : 그렇죠. 자기가 자기를 존중하지 않으면 누가 자기를 존중해 주겠어요. 자기부터 출발을 해야겠죠.

 

김진병 :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젊은이들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이제 눈 뜨기 시작하지 않느냐. 그런 점에서 우리의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는 경전들을 요새의 청소년들의 언어로 쉽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저작물들이 정말 필요하고요, 그 다음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가려면 다양한 멀티미디어 저작물들이 쏟아져 나와야 된다. 그런 점에 있어서 그런 기회에 좀 더 앞서갈 수 있는 게 불교 아닌가. 그런 쪽에서 현대 청소년들이 교육받은 게 서양의 교육 방식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현대 심리학의 이론의 근간이 될 수 있는 게 유식학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논리 체계를 가지고 있는 불교가 미래의 세계에 아마 중요한 가늠자 역할을 해 주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이 됩니다.

 

김봉래 : 그래요. 요즘 제가 새삼스럽게 많이 듣고 새기고 있는 말 중에 하나가 우리는 서로 의견이 틀린 게 아니고 의견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서로서로가 존중될 수밖에 없다. 이런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하거든요. 우리나라가 최근 한 4~5년 동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말 우리가 한 단계 의식 수준이 업그레이드 되는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보거든요. 또 그 지점에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고요.

 

김진병 : 아마 이러한 부분들은 우리가 산업화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의 일이잖아요. 이제 저희가 6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60년이면 두 세대가 지금 지나간 거잖아요. 그래서 세 번째 세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사회가 안정화되어지고, 그러면서 산다고 하는 게 잘 산다고 하는 게 뭐냐 이런 것들이 중요한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청년들이 직장을 선택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고 우리가 특히 MZ세대들의 그러한 행태들을 보면 이 자리를 설명해 주고 그들의 욕구를 가장 잘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게 불교적인 그런 삶의 태도가 아닌가. 그런 쪽에 좀 더 우리가 애정을 좀 투입할 필요가 있겠다라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진병 : 무조건적인 어떤 권위에 대한 복종 이런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할 수 있는 또 자유와 평등이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어떤 사고방식이겠죠.

 

김진병 : 그러니까 저희가 템플스테이를 하면 할수록 거기에 참여하던 사람들이 프로그램이 자기를 구속한다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내비둬. 알아서 자기가 시간을 보내고 아침에 예불을 참여하든 안 하든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할 수 있도록.

 

김봉래 : 휴식형이 요새.

 

김진병 : 대세가 아닌가. 이것은 바로 그런 곳에 이미 왔다고 하는 것은 불교적인 그런 분위기나 느낌들에 대해서 괜찮다 내가 수용하겠다, 이미 받아들인 거라고 하는 것이죠. 강압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김봉래 : 그러면서 저는 사실은 가장 답답한 게 교육 개혁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그 말씀은 많이 못 여쭙겠고요. 그래도 시간을 마치면서 김진병 소장님 앞으로 원력과 계획 듣는 것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쳐야 될 것 같습니다.

 

김진병 : 저는 지금 청소년 시절 불교와의 인연을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회향할 것인가가 화두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2020년에 퇴직을 하고 만해한용운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이제 아카이브 구축하고 그 다음에 만해 한용운 스님의 여러 저작물을 2020년대 언어로 다시 출판하는 용운당 전서 간행 작업이 있고요, 제가 손이 허락되고 가능한 데까지 노력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회향을 가름하고자 합니다. 오늘 초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봉래 : 네. 오늘 나와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김진병 : 고맙습니다.

 

김봉래 : 지금까지 김진병 만해한용운연구소 소장님과 함께했습니다.

 

김봉래 : 여러분 김진병 소장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소장님께서는 젊은 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많은 법문을 듣고 또 토론을 했고 그것이 평생의 삶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런 말씀 주셨습니다. 요즘 청소년들도 더욱 눈을 멀리 바라보고, 보다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불교방송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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