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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김영환 안동김씨역사연구회 회장

방송 : 2021년 8월 22일(일요일) 저녁 6시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 진행을 맡은 김봉래입니다. E.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오늘을 사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생존과도 직결된 부분이 바로 역사죠. 하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입장과 행동이 나올 수 있는데요. 그만큼 역사에 대해서 전체적인 조망을 하기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앞서 살아간 선조들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오늘을 사는 우리의 발길을 조심스럽게 내딛는 자세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문중 가운데서는 드물게 역사 연구 모임을 가지고 꾸준히 성과를 내는 곳이죠, 안동김씨역사연구회의 김영환 회장님 모시고 말씀 나누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앞서 소개해드린 대로 오늘 이 시간에는 안동김씨역사연구회 김영환 회장님을 불교방송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영환 : 네. 안녕하십니까.

 

김봉래 : 우리 김영환 회장님은 충렬공김방경기념사업회 회장도 맡고 계시죠. 먼저 안동김씨역사연구회가 어떤 단체인지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영환 : 네. 안녕하십니까. 안동김씨역사연구회를 맡고 있는 김영환입니다. 안동김씨역사연구회는 원래 안동김씨 문중사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임으로 2001년도에 출발했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결성된 지가 20년이 넘었는데요. 어떻게 해서 결성하게 되었는지요.

 

김영환 : 2001년 11월 11일이었던 것 같아요. 안동김씨 홈페이지가 개설을 했었는데요, 그 때 홈페이지를 즐겨 찾는 8명이 모여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홈페이지에 올릴 자료를 찾는 게 주목적이었는데, 기록이 잘못된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이런 것을 고쳐나가는 재미로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김봉래 : 우선 안동김씨 하면 떠오르는 게 조선시대 말에 세도정치 아니겠습니까.

 

김영환 : 거기는 우리 안동김씨가 아니라 신(新)안동김씨입니다.

 

김봉래 : 신안동김씨요.

 

김영환 : 네. 안동김씨와 신안동김씨는 전혀 다른 집안입니다.

 

김봉래 : 네. 송구합니다.

 

김영환 : 우리 안동김씨는 고려 충렬왕 때 삼별초난을 정벌하고 두 번에 걸쳐서 일본을 원정하고 수상까지 역임하신 김방경 할아버님을 중시조로 하고 있고요. 신안동김씨는 병자호란 때 김상헌 선생을 비롯해 그 이후에 세력이 커져서 조선 말기에 소위 세칭 세도정치를 한 대단한 집안이죠. 저희는 안동김씨입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안동김씨와 신안동김씨 전혀 다른 집안이다 이런 말씀이신데요. 그럼 우선 안동김씨 집안 인물 가운데 저희가 알만한 분들 소개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영환 : 대표적으로 우리가 보통 충무공하면 이순신 장군만 생각하죠. 조선시대 충무공 시호를 받으신 분이 아홉 분이나 계십니다. 그 중에서도 적과의 전투 속에서 훌륭한 성과를 내고 전사하신 분에게만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어요. 그 분이 충무공 아홉 분 중에 단 세 분밖에 안 되십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이 한 분이고요, 나머지 두 분이 우리 안동김씨입니다.

 

김봉래 : 네. 어떤 분들이시죠.

 

김영환 : 한 분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의 주인공이신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시고요.

 

김봉래 : 아. 김시민 장군님.

 

김영환 : 네. 그리고 또 한 분은 광해군 때 명나라의 요청으로 지금의 만주 쪽에 파병된 심양 쪽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신 충무공 김응하 장군. 두 분 다 영의정에 추증되셨고 충무공의 시호를 받으신 분입니다. 근세에 인물 중에서 여러분 계십니다만 한 분만 꼽으면 바로 백범 김구 선생님이 저희 집안이십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백범 김구 선생님. 독립운동가이시고요. 안동김씨인 것은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일단 안동김씨역사연구회가 그 동안에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간단히 소개를 해주실까요.

 

김영환 : 중요한 것만 말씀드리면요. 2012년이 안동김씨 중시조이신 충렬공 김방경 할아버님의 탄신 8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탄신 80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했었는데요. 충렬공 할아버님에 대한 삼별초 정벌이라든가 일본 정벌이라든가 그 분에 대한 논문이 산재했던 것을 모아서 충렬공 논문집을 저희가 간행을 했고요. 이 때 기념식에 맞추어서 서울과 안동에서 학술대회를 했었는데, 충렬공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가 여기저기 많이 흩어져 있는 거예요. 그것을 모두 모아서 있는 그대로 조금도 가감 없이 <충렬공 김방경 자료 집성>이라는 전 3권의 대작을 저희가 발간했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그 밖에 다른 업적들도 있으시죠.

 

김영환 : 우리 안동김씨역사연구회에서는 우리 선조님들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충렬공 할아버지가 여몽 연합군을 이끌고 일본 정벌을 두 번이나 하셨거든요. 대마도를 거쳐서 이끼섬을 거쳐서 하까다, 지금의 후쿠오카 지역을 정벌을 하셨는데, 이 루트를 따라가는 여행을 비롯해서 이번에 간행한 금석집첩을 따라가는 여행, 그런 식으로 일본 답사가 세 번 있었고요. 또 백범 김구 선생님의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충칭까지 여러 번 옮겨 다녔지 않습니까. 그 여정을 따라가는 답사 또 우리 척약재 김구용 선조님이 고려 말에 중국에 유배를 가셨는데 그 유배길을 따라 찾아가는 여행등, 해서 중국 답사도 네 번이나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번에 금석집첩 안동김씨 편을 영인해서 원본 그대로 2권 1질, 100질 한정판으로 발행했고요. 지금 보시는 이 책과 함께 번역본은 300권을 간행하게 되었습니다.

 

김봉래 : 답사까지 하시고 굉장히 전문적인 단체가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드는데, 오늘은 사실은 금석집첩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여쭤보고 싶어서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거든요. 우선 금석집첩이 어떤 책인지 먼저 개관을 좀 해주실까요.

 

김영환 : 우선 이번에 간행된 저희 책은 금석집첩(金石集帖) 219권 중에서 저희 선조님에 관련된 자료만 28점을 찾아서 저희가 영인해서 만든 책입니다.

 

김봉래 : 그 책이 언제 어떻게 해서 발간이 됐던 책인지 자세히 좀 알려주시죠.

 

김영환 : 금석집첩은 조선 영조 때 당시의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 선생님이 청풍김씨죠. 이분이. 이 분의 노력으로 시작된 것 같아요. 왜냐하면 금석집첩에 청풍김씨 비문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으로 보면 김재로 선생이 시작했던 것 같고요. 거기에 호도 있는데, 아마 이분의 호가 아닐까 싶어서 김재로 선생께서 시작된 것 같은데, 아마 당시에 우리나라의 유명한 금석문을 탁본해서 탁본첩으로 만들었습니다.

 

김봉래 : 탁본첩이요.

 

김영환 : 한 100년 동안 시작되었어요. 왜냐하면 금석집첩을 보면 그 시대를 알 수 있거든요. 왜냐하면 비석을 세운 날짜가 나오고 하니까. 한 100년 동안 작업을 해서 2,500권의 탁본을 오리고 붙여서 260여 책으로 만들어서 금석집첩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거니까 260권이면 어마하게 많거든요. 우리나라의 규장각이든지 왕실에 보관되어 있거나 후에 우리나라 국가기관이나 국립도서관에 있어야 할 텐데, 우리나라에는 전질이 없어요. 이 귀중한 책이. 어쩐 일인지 금석집첩 260권 중에서 219권이 일본 교토에 있는 교토국립대학 도서관에 있는 거예요.

 

김봉래 : 260책 전체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김영환 : 우리나라에는 규장각에 딱 한 권이 있고요. 또 금석집첩과 같은 종류인데, 금석록이라든가 금석첩이라든가 정리된 것이 72책이 있긴 있어요. 같은 종입니다. 아마 그 때 탁본을 두 벌 떠서 두 권 만들었지 않나 싶습니다. 이것이 규장각에 몇 개 있고요. 고려대학교 우당기념관에 있고요. 개인이 몇 권 가지고 있는 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책 내용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밝혀지기 전까지는 우리가 아주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던 책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어요.

 

김봉래 : 그런데 이 귀중한 책이 왜 우리나라에는 없고 일본에는 있었을까요.

 

김영환 : 뭐 교토대학교에서 간행한 자료에 의하면 자기네가 1910년, 그러니까 일본이 쳐들어왔을 때 1910년이 국치년인데, 그 때 구입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교토대 도서관에는 그 이후에 조선 말에 헌종 때인가요, 풍양조씨 조인영 집안에서 나온 책이다,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만 정확하게는 모르기 때문에 이 부분도 우리가 앞으로 연구해야 할 대상입니다.

 

김봉래 : 그러면 안동김씨역사연구회에서는 이 금석집첩을 어떻게 해서 알게 되셨는지요.

 

김영환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충렬공 할아버지의 묘소가 안동에 있는데요, 안동에 가보면 앞뒤가 아주 반반한 백비 상태의 비석이 서 있습니다. 이게 임진왜란의 직후에 세운 비석인데, 이게 한 글자도 안 보이고 전혀 판독할 수 없는 그런 비가 하나 있어요. 그런데 이 비를 탁본한 것이 바로 금석집첩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2012년에는 교토대에 있는 것은 모르고 국사편찬위원회에 자료가 있다고 해서 국사편찬위원회에 가서 그 자료를 제공받아서 그 탁본을 해독하고 번역해서 아까 말씀드렸던 충렬공김방경자료집성에 게재한 바 있고요. 또 아울러 문정공 김질 선조님의 비문도 지금 가보면, 이것은 한 600년 가까이 된 비석인데 다 마모되어서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김질 할아버지 신도비문을 서거정 선생님이 지었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럴 경우에 보통 서거정 선생님 문집이 사가정집인데 사가정집에 글이 있을 텐데 이상하게 그 사가정집에도 비문이 없는 거예요. 비문의 내용을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던 거예요. 그런데 바로 이 금석집첩에 300년 전에는 뚜렷하게 볼 수 있는 탁본이 있어서 이것도 우리가 똑같이 탈초하고 번역해서 경현문집에 싣게 되었습니다. 이 금석집첩을 간행하기 위해서 2019년 3월에 교토에 있는 교토대학 도서관에 제가 직접 방문을 했습니다. 회원들을 데리고. 그래서 이 때 금석집첩 219권을 실제 확인을 했고요. 우리가 이 탁본을 쓰겠다고 허락받고요. 그래서 우리 안동김씨 선조님들에 관련된 28점의 탁본을 추려서 원본 그대로 실물 크기의 영인본을 만들고 탁본 내용을 판독하고 번역본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김봉래 : 네. 어떻게 보면 한일 양국 간의 문화교류 차원에서도 아주 귀중한 일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이 탁본첩에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요.

 

김영환 : 묘비가 가장 많죠. 묘비에는 조선 왕릉의 왕릉비들도 있고요, 뭐 또 유명한 사대부들의 묘비, 신도비를 비롯해서 사적비, 유허비 같은 게 있습니다. 묘비로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유명한 선현들, 고위관료들의 탁본이 수록되어 있고요. 그 중에서 특히 글씨를 우리가 볼 수 있으니까 유명한 분들만 말씀드리면 신라 때 김생의 글씨를 집자한 비문도 있고요. 신라 말 고운 최치원 선생의 글씨, 신라 말에 유명한 명필이었던 영업스님의 글씨, 대감국사 탄연국사의 글씨도 금석집첩에서 볼 수 있고요. 그 외에도 조선시대 명필로 알려진 한석봉, 오준, 김희수-김로 부자, 송인, 안침, 이정영, 신익성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필들을 볼 수 있어서 아마 서예사적으로도 굉장히 귀중한 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봉래 : 아주 귀중한 자료들이 많이 실려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일단 생각나시는 대로 중요한 비문을 좀 소개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영환 : 가장 오래된 비문으로서는 신라 말에 비문이 있는데요, 최치원이 짓고 최치원 친필로 쓴 쌍계사 진감국사비. 이것은 지금 쌍계사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김봉래 : 네. 쌍계사 진감국사비

 

김영환 : 많이 훼손되고 깨졌어요. 우리나라 4대 명필인 김생에 버금간다고 서예사에 내려오는 영업스님의 필적이 있는데, 근래 어느 박물관장 어느 분이 영업스님이 김생의 법명이다 이렇게 발표하신 것도 있어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영업스님의 필적이 신행선사비.

 

김봉래 : 신행선사비.

 

김영환 : 그 다음에 대감국사 탄연스님의 탄연선사비, 탄연스님의 친필이 춘천에 있는 청평사라는 절에 있습니다. 굉장히 오래된 절인데, 청평사에 가면 탄연스님이 친필로 쓴 문수원기라든가 진락공제문 같은 탄연스님의 친필 비문이 있고요. 또 대구에 가면 유명한 동화사가 있는데 그 동화사에 홍진국존비도 있고요. 이 금속집첩에. 또 북한 국보로 되어 있는 현화사비,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비도 이 금석집첩에 들어 있습니다.

 

김봉래 : 북한에 있는 국보, 비석들, 비문도 들어 있다 이런 말씀이시네요.

 

김영환 : 그 중에서도 진감국사비는 쌍계사에 현존하고 있고요. 그리고 나머지는 다 실물을 볼 수 없습니다. 신행선사비라든가 탄연비라든가 또 청평사 문수원기 같은 것은 다 실물이 없습니다.

 

김봉래 : 그러면 이 몇몇 개의 비편만 남아 있다 이런 이야기인가요.

 

김영환 : 네. 홍진국존비도 주먹만한 비편 서너 개의 탁본만 있어요. 그리고 신행선사비와 탄연비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작은 조각만 지금 보관되어 있습니다.

 

김봉래 : 북한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김영환 : 북한에 있는 것은 우리가 볼 수가 없는데요. 특히 지금 현화사비는 현재 개성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해요. 그런데 그게 고려 현종 임금이 직접 쓴 거예요. 그래서 북한에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고요. 또 고려 때 인종 임금이 전액(篆額)을 한 보현사비는 김부철이 글을 지었는데요, 김부철은 유명한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동생입니다. 그런 비를 우리가 볼 수 있고요. 특히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금강산에 있는 서산대사비라든가 풍담당대사비, 편양당대사비 이런 비석도 금석집첩에 실려 있고요. 현재 개성에 가면 남대문에 연복사 종이 걸려 있는데요. 그 연복사는 아마 지금 폐절되고 없나 봐요. 연복사에 있던 종이 개성 남대문에 걸려 있는데 이것도 북한 국보라고 합니다. 이 연복사 종명의 탁본도 금석집첩에 실려 있는 거예요.

 

김봉래 : 아. 그렇군요. 그러면 이 많은 2,000여 점의 탁본 가운데 안동김씨 관련은 몇 점입니까.

 

김영환 : 28점인데요. 그 중에서 비문이 26점이고요. 한 점은 선조님의 친필 비문인 바로 홍진국존비입니다. 이 할아버지가 하여튼 명필이라고 하셔서 중국에서도 쓰신 비문도 있고 한데 지금 전해오는 게 거의 없어요. 홍진국존비도 없고요. 그런데 이 홍진국존비 탁본이 이 금석집첩에 들어 있는 거예요. 참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점 바로 아까 말씀드렸던 우리나라 5대 명종 중에 하나라고 알려져 있는 연복사 종에 양각으로 된 종명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 외에도 우리 26점의 비문들이 전국에 있는 것을 일일이 여덟 차례에 걸쳐서 답사해서 비석의 실물이 현존하는가 아니면 상태가 어떤가 일일이 확인을 하고 해서 이 비문을 활자화해서 번역본에다가 현대문에 맞게 번역해서 실었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다고 한다면 이 금석집첩을 통해서 전문이 밝혀진 것들이 많다 이런 이야기가 되는데, 이 책에서 주목할 것은 앞에서 말씀해주신 거 외에도 아주 많이 있죠.

 

김영환 : 예. 뭐 이것을 다 말씀드릴 시간은 없고요. 아까 말씀드렸던 충렬공 할아버지의 백비로 되어 있던 것도 찾아냈고, 문정공 할아버지도 찾아냈다고 했고요. 저희 집안에서 영의정을 지내신 문경공 김수동 할아버지의 신도비도 양천에 있었어요. 옛날 기록에. 그런데 양천이 지금의 목동지구거든요. 목동지구 개발하면서 신도비가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어요.

 

김봉래 : 신도비라는 게 뭡니까.

 

김영환 : 신도비라는 것은 그 분의 업적을 기록해서 묘소 입구에 세운 커다란 비석을 신도비라고 합니다. 그런데 목동 개발할 때 없어져서 이 글을 지은 신용개 선생의 문집에서 보고 다시 해서 대조를 했는데 그 원본이 바로 금석집첩에 있는 거예요. 목동에 없어졌던 것이.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대조해보니까 많이 달라요. 신용개 선생 문집에 있는 거하고. 또 지금 비무장지대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는 한성부 좌윤공의 비문이라든가 아까 말씀드린 동화사 홍진국존비라든지 실물이 없고 탁본도 완전한 것이 없어서 다른 탁본 관련 문헌에도 잘못 전해지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번 금석집첩을 통해서 우리가 완전히 확인할 수 있었죠.

 

김봉래 : 그러면 이 금석집첩에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그런 내용도 많겠죠.

 

김영환 : 간단히 말씀드리면 우리 충무공 김응하 할아버지의 사당이 철원의 포충사에 있는데요, 거기에 가면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은 묘정비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충무공 김응하 할아버지는 우리 안동김씨가 아니라 경주김씨라고 잘못 쓰신 거예요. 그래서 이게 우암 선생의 잘못인지 글씨로 유명한 박태유 선생이 썼는데 그 분이 잘못 썼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문정공 비문도 그 유명한 서거정 선생의 문집에 없어요. 아마도 문정공 할아버지에 대한 비판 때문에 후손들이 뺐지 않나 싶고요. 또 몇몇 비에도 보면 우리 선조 중에서 무고로 역모에 몰린 분이 나중에 신원되었지만 그런 분이 계신데, 비석에 자손들이 있는데 그것은 지우고 쪼아서 없앤 거 이런 것도 있어요. 이런 것들이 많은 연구 대상이고요.

 

김봉래 : 그렇군요. 자. 이 금석집첩이 탁본인데 오류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요.

 

김영환 : 금석집첩이 탁본이지만 탁본 그대로 책을 만들 수 없으니까 이것을 조각조각 오려서 책을 만들었어요. 이런 과정에서 오류가 나왔죠. 홍진국존비 비문도 탁본에 보니까 한 글자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비문을 보면 가로 세로 딱 맞아야 하는데 한 글자가 비어 있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 한 일(一) 자가 금석집첩에 빠져 있습니다. 오려 붙이면서 빠진 것 같아요.

 

김봉래 : 네.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안동김씨역사연구회 김영환 회장님과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김영환 회장님 오늘 금석집첩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보면 거기에 불교 관련 내용도 있지 않습니까. 좀 말씀을 덧붙여주실까요.

 

김영환 : 동화사에 가면요, 홍진국존비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드리죠. 동화사 홍진국존비는 1298년인가 고려 충렬왕 때 세운 비석이에요. 현재 동화사에 가보면 홍진국존부도라고 알려진 보물로 지정된 부도만 있고 비석은 온 데 간 데 없어요. 이 홍진국존비도 주먹만한 파편 몇 조각만 전해 내려오고 있고요. 1800년대에 탁본한 것이 있는데, 그것도 탁본은 없고 그 탁본을 찍은 사진만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 1800년대 탁본을 뜰 때도 비석의 한 귀퉁이가 파손되어서 완전하지가 못해요. 우리나라에 금석문을 정리한 책들이 몇 가지 있는데, 조선금석총람이라든가 해동금석원 같은 책에도 홍진국존비의 자료가 오류가 많아요. 그러나 이 금석집첩에는 거의 그대로 글씨도 선명한 탁본이 있어서 그대로 복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 그 탁본을 원상태로 출력한 것을 보시죠. 이게 1800년대에 탁본한 유정수본의 사진본이고요, 또 이것이 금속집첩에 있는 탁본을 저희가 오려 붙여서 실물 크기로 만든 겁니다. 현재 새로 탁본한 것 같이 아주 선명하죠?

 

김봉래 : 네.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 밖에도 주목할 만한 것들 소개를 해주실까요.

 

김영환 : 교토대에 보관된 219권의 금석집첩 중에서 불교 관련 탁본첩이 9권에 80여 점이 실려 있습니다. 주로 스님의 비문으로서 국보가 두 점이 있고요, 보물이 11점이 있고 현재 볼 수 없는 비석인 신행선사비라든가 또 당대의 명필 영업스님의 글씨가 바로 신행선사비가 바로 영업스님의 글씨인데요, 이 중앙박물관에 탁본만 보관되어 있고 비석은 없어요. 또 대감국사 탄연비도 현재 실물은 없고 문경 김룡사인가 어디에 탁본만 있다고 전해집니다. 탄연스님의 필적인 춘천의 청평사 문수원기와 진락공제문비석도 현재 파괴되어 없습니다. 이 금석집첩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볼 수 있죠.

 

김봉래 : 네. 그렇군요. 고승들의 이 귀한 비문이 많다. 이런 생각이 좀 드는데요. 그럼 그중에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그런 고승의 비문도 있나요.

 

김영환 : 네. 특히 북한 금강산과 묘향산의 비문들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해드리면요, 현재 우리나라 스님들 중에서 많은 분들의 법맥이 서산대사, 편양당대사, 풍담당대사 들의 법손이거든요. 그런데 이 금석집첩에 편양당언기대사비와 풍담당의심대사비가 실려 있는데요, 이게 어느 자료에도 없는 비문입니다. 연구가치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요. 이 두 분의 비석이 금강산과 묘향산에 각각 하나씩 있어요. 특히 금강산과 묘향산은 이런 유명한 스님들의 비문이 25점이나 실려 있어서 지금 우리가 가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 탁본으로라도 만나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네.  안동김씨 집안에서 이렇게 역사연구를 꾸준히 해오셨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떤 것인가요.

 

김영환 : 글쎄요. 비결은 우리 회원들이 한 20년 넘도록 우리 문중사를 연구하면서 내 조상이라고 해서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묻힌 자료와 잘못 알려진 자료를 정확한 근거에 의해서 정리하고자 했던 원칙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오히려 답사할 때 비용도 각자 회원이 부담했던 것을 원칙으로 했던 것도 하나의 비결이라고 할까요. 회원 각자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들을 한 편의 영화를 만들 듯이, 영화를 만들려면 조명, 음향 이렇듯이 종합예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회원들이 참여해서 작품을 만든다는 것도 아마 비결이라고 하면 비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재능기부 참 좋은 겁니다. 특히 금석집첩을 발간하겠다 이렇게 발원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으셨는지요.

 

김영환 : 우리가 몰랐던 자료를 일본에서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참 그 중에서 우리 안동김씨 금석문만이라도 발간을 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고요 또 이로 인해서 금석집첩에 관한 많은 연구와 관심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했습니다. 아울러 불교계에서도 금석집첩 불교편을 발행해서 복원과 연구자료로 활용할 수 있기를 좀 기대합니다. 송광사 대경스님이나 박물관장 고경스님도 많은 관심 갖고 계셔서 제가 이 책을 한 질을 보내드렸습니다. 원하는 문중이나 원하는 동화사 같은 데서 자료를 요청하면 제가 기꺼이 자료 제공하겠습니다.

 

김봉래 : 자. 우리 김영환 회장님 앞으로 할 일, 계획도 있으실 것 같은데 어떠신지요.

 

김영환 : 올해는 저희 선조 중 척약재 김구용 선생의 문집 국역본을 간행 중에 있고요. 군사공 김칠양 자료집 발행이 올해 끝날 겁니다. 민간외교사절단 반크라고 있는데요, 여기서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 4대 목록을 작성해서 세계에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개는 누구나 다 잘 아는 한글, 직지, 팔만대장경이죠. 나머지 하나는 잘 몰라요.

 

김봉래 : 네. 저도 잘 모릅니다.

 

김영환 : 이 반크에서 선정한 것이 바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입니다.

 

김봉래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김영환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줄여서 강리도라고 합니다.

 

김봉래 : 혼일강리도. 아. 그렇군요. 자. 그런데 이것을 앞으로 더 연구를 하시겠다 이런 계획을 좀 세우고 계신 것 같아요. 회장님.

 

김영환 : 네. 이 강리도가 우리나라가 그린 동양 최초의 세계지도인데요. 태종 2년에, 1402년인가요 좌정승 김사형과 우정승 이무가 검상 이회에게 명해 만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때 1400년 초에는 유럽에서는 아프리카 대륙도 사하라 남쪽 사막 남쪽은 모를 때였어요. 아프리카 대륙의 희망봉이라든가 나일강의 원류까지도 강리도에는 그려져 있는 거예요. 이 강리도가 그려진 이후 한 80년이 지나서야 포르투갈의 디아스라는 분이 희망봉을 발견하게 되죠. 그 후에 한 10년 지나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되고요. 지중해 연안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있는데 거기에 전설 속의 파로스 등대가 있다고 하는데 이 강리도에는 그려져 있는 거예요. 1300년도인가 지진으로 인해서 지중해로 빠졌다고 하는데 이게 높이가 100m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도에만 있고 실물은 없었는데, 뉴스에 보니까 며칠 전에 프랑스 해양 탐사대가 지중해 바다 속에서 이 파로스 등대를 실제를 찾아냈대요.

 

김봉래 : 네. 그래서 이 강리도의 복제사업을 하시겠다 이런 말씀이신가요.

 

김영환 : 네. 혼일강리역대국도 복원 작업에 정진할 거고요. 학자들이 논문에도 보면 태종의 명에 의해서 그렸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어디에도 기록이 없어요. 양촌 권근 선생님이 발문을 썼는데 양촌 선생이 쓴 발문을 보면 거의 다 임금의 치적 찬양인데 이 강리도 발문에는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연구할 대상이고요. 또 서역 지방이나 유럽, 아프리카의 지명이 당시 아랍어의 발음을 한자로 표시되어 있어요. 그래서 현재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현재 지명으로 밝혀내는 작업도 해야 하고요. 그렇습니다.

 

김봉래 :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은 반성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좀 드는데요. 어떠십니까.

 

김영환 : 네. 이 강리도도 중화사상으로 그렸다든지 뭐 여러 가지 지도를 합쳐서 그렸다든지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데 우리의 훌륭함을 폄하하는 글이 난무하고 있어요. 중국에 견주어서 우리나라 지도를 한 10배 정도 더 크게 그렸으니까 우리 중심의 지도라고 해도 되고요. 그 당시에 측량 기술이 없으니 중국지도, 일본지도, 유럽지도, 이런 것을 다 합해서 그릴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 지도도 일본에 보관되어 있고 우리나라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가 잘 모르고 있고, 연구되지 않아서 이 복제사업을 계기로 해서 한 4천여 개가 넘는 세계의 지명연구와 우리가 자랑할 문화유산을 우리가 먼저 인식하고 문화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김봉래 : 네. 김영환 회장님 혹시 불교와 인연이 있으신지요.

 

김영환 : 네. 저는 모태 불교신자입니다. 어렸을 때는 무엇 모르고 어머니를 따라다녔죠. 절에 가면 무섭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남양주에 있는 봉선사의 말사인 보광사에 가산선우스님 주석하고 있는데요. 이 절에서 한 15년간 제가 신도회장을 했습니다. 현재 가산스님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와 이석영, 이회영 5형제 애국지사의 삶을 조명하는데 힘쓰고 있고요. 신흥무관학교 자금 중에 우리 보광사 재산도 들어갔습니다. 또한 보광사 인근에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암각문(巖刻文)의 문화재 지정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혹시 우리 한국불교 종단에 건의하고 싶은 내용 안 계실까요.

 

김영환 : 제가 감히 말씀드리기는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불교 문화재의 건물이라든가 이런 하드웨어에 집중하다 보니 소프트웨어가 조금 부실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고요. 우리나라 문화재 대부분이 불교 문화재 아닙니까. 이것을 보존하고 연구 개발하는 데 좀 더 관심을 기울여서 이러한 것이 널리 알려지는 것이 요즘 세대에 MZ 세대에 맞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김봉래 : 네. BBS 불교방송 같은 매체에도 당부하고 싶은 말씀 주시기 바랍니다.

 

김영환 : 뭐 불교방송국이 정말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을 불자로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불교 문화를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문화강국으로서의 국민으로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국민들이 불교방송을 많이 애청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김봉래 : 네. 끝으로 회장님의 원력 내지는 계획을 소개해주시는 것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김영환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복원 사업에 여생을 받칠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화를 지키고 찾아내고 바로 알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 안동김씨 역사연구회의 이념과 부합되는 일이니까요.

 

김봉래 : 네. 우리 김영환 회장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고요. 앞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영환 : 고맙습니다.

 

김봉래 : 지금까지 안동김씨 역사연구회 김영환 회장님과 함께했습니다.

 

김봉래 : 네. 여러분 김영환 회장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잃어버린 문화 유산을 복원하는 일은 우리의 역사, 우리 민족의 얼을 되찾는 일입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일을 국가나 지자체만이 아니라 종중의 한 모임에서 해냈다는 사실에 커다란 찬사를 보냅니다. 그야말로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불교방송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편안한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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