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 포토시는 17세기 아메리카 대륙의 최대 도시였다. 떠들썩하게 끓어오르는 무법천지 붐타운으로, 사치와 향락과 조직폭력배로 대변되는 도시였다. 인디언 일꾼들이 수백 피트 갱도에서 은을 추출하고 뱉어내는 살인적이고 효율적인 기계 장치 역할을 했다. 이렇게 완성된 스페인 은화와 실버 바가 체인으로 연결된 은 수송대의 첫 체인인 함대에 실려 세계 각지로 수출됐다..." 언론인 찰스 만의 베스트셀러 <1493>에는 당시의 본위 화폐인 은을 채굴해 중국과 교역하는 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인디언 일꾼들의 피땀으로 건설된 포토시는 600여년이 흐른 지금 비트코인 채굴 현장을 닮았다. 아메리카산 은 중심 시대에서 금과 달러 본위제로 바뀐 뒤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너도나도 블록체인으로 연결된 암호화폐 신대륙으로 달려가고 있다. 지난달 처음 주식 계좌를 만든 나는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고, 당장 갖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숱한 곡절을 거쳐 결국 금융시장의 주류로 자리잡을 것 같다. 세계 역사의 제 2막을 열었던 콜럼버스발 신대륙 개척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불나방처럼 모여든 이들이 일군 ‘무법천지’에서 성취된 것임을 <1493>은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향하고 미국인들이 서부를 개척한 것처럼 세계 경제는 지금 ‘메타버스(Metaverse)'로 치닫고 있다. 메타버스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3차원 가상 공간을 의미한다. 전세계 빅테크 기업은 물론 우리 IT업계의 화두도 단연 메타버스다. 대면 접촉이 어려운 코로나19 상황까지 겹치면서 메타버스 기술의 속도전도 불붙었다. 가상공간에서 아바타로 구현된 개인이 업무, 취미는 물론 경제활동까지 하는 시대에 암호화폐 생태계 확장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일 것이다. 최근 잭 도시 트위터 CEO는 2분기 실적 발표장에서 암호화폐의 대표 격인 비트코인이 인공지능, 분산과 함께 트위터의 미래를 이끌 3대 키워드라고 선언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은 비트코인 결제를 허용할 것이란 일부 언론 보도를 부인했지만 앞서 디지털 화폐, 블록체인 분야 전문가 채용 공고를 냈다. 물론 아마존은 위험투자군으로 분류되는 비트코인을 그리 재빨리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어쨋든 21세기 메타버스로 가는 길목에서 암호화폐와 실물경제의 간격은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버지니아 컴퍼니가 식민개척자를 보내는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무려 100척이 넘은 선박이 대서양을 건넜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배를 타고 떠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도착 후 몇주 혹은 수개월 내에 사망하는 상황이 몇해에 걸쳐 반복됐다. 1607~1624년 사이 7,000명이 넘는 영국인이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버지니아로 갔다. 그들 중 8할이 수개월 안에 목숨을 잃었다...”  희망을 품고 버지니아로 온 영국인 대다수는 기근과 무지로 인해 곧장 죽었다. <1493>은 이렇게 실증을 토대로 신대륙 식민개척지 초기 상황을 기술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 미지의 세계에 몸을 던진 젊은이들의 무모함은 콜럼버스 시대나 2021년이나 다르지 않다. ‘영혼까지 끌어모은’ 탐욕과 환희, 공포와 좌절은 아메리카 동부에 갓 정착한 시점과 비견되는 블록체인 개척기를 혼란스러움으로 포장한다. 이 상황을 돌파할 관건은 유럽 여러나라 왕실의 후원과도 같은 각 나라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암호화폐로 돈을 벌겠다는 젊은이들을 투기꾼으로만 바라보는 지금처럼 망망대해에 배를 띄워 무작정 인도로 가겠다고 나선 15세기 유럽 몽상가들도 당시에는 사기꾼 취급을 당했다. 21세기 신대륙을 메타버스로 열겠다고 한다면 탈중앙화된 금융시스템이 갖는 장점과 투기 광풍이 낳는 부작용을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암호화폐 투기는 잘못된 길로, 어른들이 잘못됐다고 얘기해줘야 한다"고 일갈한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꼰대같은 모습으로는 미래를 헤쳐갈 수 없다. 성큼 다가온 메타버스 미래는 600년 전 신대륙과 데칼코마니 처럼 마주보인다. 아메리카의 첫 히트상품 ‘타바코(담배)’는 죽음의 이민 행렬에서 싹이 텄다. 대서양 건너편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주문만을 유럽 왕실이 되풀이했다면 일확천금을 꿈꾼 젊은이들의 무모한 희생은 약간 줄일 수 있었을 테지만. <1493>을 읽으면서 '쓸모 있는' 암호화폐의 미래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 굳어졌다./이현구 경제산업부 기자

저작권자 © BBS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