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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

현대 한국 불교사의 산증인이자 불교계의 사회 참여를 이끈 태공당 월주 대종사의 추모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태공당 월주 대종사의 생애와 생전 가르침,후학들에게 남긴 과제 등을 자세히 짚어보겠습니다. 

보도국 전경윤 문화부장 나와있습니다.

질문 1.현대 한국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태공당 월주 대종사가 22일 원적에 들었는데요. 스님의 행장을 먼저 살펴볼까요 ?

답변 1.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차례 역임하고, 중앙종회의장을 지내며 오늘날 조계종단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 태공당 월주대종사가 22일 제17교구본사 금산사 만월당에서 원적에 들었습니다. 

세수 87세. 법납 68년입니다.

월주대종사는 1935년 전북 정읍 산외에서 태어나 산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했습니다. 

1950년 중동중학교 졸업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해 학업을 잇지 못했고 전쟁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이 결국 스님을 출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1954년 제5교구본사 법주사에서 금오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56년 제19교구본사 화엄사에서 금오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습니다. 

1961년 26살의 젊은 나이에 조계종 제17교구본사 금산사 주지를 맡았고, 같은 해 조계종 전북종무원 원장, 불교전북교원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월주스님은 1980년 조계종 제17대 총무원장, 1994년 조계종 개혁 당시 제28대 총무원장, 금산사 회주와 조실, 남원 실상사 조실,조계종 원로의원을 지냈습니디.

총무원장직을 마친 뒤에는 이른바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한 대사회 활동에 나서서 경실련 공동대표, 정의사회시민운동 대표, 우리민족서로돕기 대표 등 폭넓은 사회활동으로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불교계 사회참여운동의 선구자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또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위원장,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돌봐온 나눔의집 이사장,저개발 국가 지원사업을 하는 지구촌공생회 이사장 등을 맡았습니다.

월주스님은 국내외에서 활발한 나눔과 봉사 활동을 펼쳐 2012 만해대상 평화부문 수상, 2000년 국민훈장 모란장, 2005년 조계종 포교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입적하기 전에 남긴 임종게도 깊은 울림을 전했는데요.

‘하늘과 땅이 본래 크게 비어있으니, 일체가 또한 부처이구나, 오직 내가 살아왔던 모든 생애가, 바로 임종게가 아닌가’입니다. .

질문 2.월주대종사는 10.27 법난의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한데 10.27법난과 월주스님에 대해 설명해주시죠

답변 2.스님이 총무원장 소임을 맡던 1980년 봄은 ‘민주화의 봄’이라 여겨지던 해였지만 신군부가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광주에서 시민들을 진압하면서 민주화의 불꽃이 사그라졌습니다. 

월주 대종사는 총무원장 취임 20여 일만에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소요사태 진상조사 선무단’을 광주에 보냈고 ‘광주시민돕기대책본부’를 설치하고 모금 운동을 펼쳤습니다.

스님은 광주에 내려라 민주화운동 희생자 영가 천도재를 봉행했고 위로금을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을 지지하는 성명 요구를 몇 차례 거절한 것 때문인지 신군부는 80년 10월 27일 불교를 정화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스님과 불교계 인사들을 연행하고 전국 사찰을 무차별 수색했습니다. 

스님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향후 2년간 공직을 맡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미국으로 떠나 LA 반야사 등에서 3년을 보내야했습니다.

스님은 14년만에 다시 총무원장을 맡았고 10.27 법난 진상규명추진위원회 대표를 맡아 신군부의 사과와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월주스님의 생전 육성을 들어보겠습니다.

태공당 월주 대종사(2016년 9월)

[10.27법난을 겪고 난 후에 미국에 가서 3년 동안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유럽과 또 동남아시아와 인도 성지를 돌아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개혁하고 개혁의 중심이 돼서 개혁하고 그리고 그만 둔 뒤에 바깥으로 눈을 돌려서 지평을 넓히는 일을 해왔습니다.]

질문 3.월주 대종사 원적에 맞춰 5·18민주유공자유족회 등 오월단체들이 추도문을 냈다고요 ?

답변3.네 5·18기념재단과 5·18민주유공자유족회,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 등 추도문을 통해 “1980년 10월 월주스님이 전두환 군부정권 지지성명 지시를 거부하고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봉행했다”고 전했습니다.

오월단체들은 생전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수행과 자비행을 몸소 보여준 월주 스님을 추모하고 기억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질문 4.월주 대종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보금자리 나눔의 집을 설립하는 등 할머니들을 위해 헌신해오지 않았습니까 ?

답변 4.스님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상처를 평생 가슴에 담고 사는 할머니들을 위해 1998년 경기도 광주에 나눔의 집을 마련했습니다.

스님은 1992년부터 ‘위안부 할머니’를 모실 집을 마련했지만 주민들이 ‘혐오시설’ 등의 이유로 항의해 이사도 몇 차례했고 경기도 광주에 나눔의 집을 건립해 세계평화와 인권을 상징하는 도량이 됐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나눔의집의 일부 직원들이 후원금 횡령 의혹 등을 제기하면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하고 건강도 급속히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광주시와 경기도의 특별점검 결과 후원금 횡령과 할머니들에 대한 학대 정황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지만 경기도는 나눔의집 이사진 5명에 해임을 명령하고 관선이사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경찰과 검찰은 나눔의집 이사진에게 제기됐던 모든 의혹에 대한 무혐의를 최종 결정했고 스님 이사진들을 현재 소송을 제기한 상태입니다.

질문 5.스님은 저개발국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한국불교의 자비정신을 전하기 위해 지구촌공생회를 설립해 한국 불교의 위상을 크게 높였죠 ?

답변5.스님은 2003년 NGO 지구촌공생회를 설립해 국경 없는 자비행을 펼쳤습니다. 

캄보디아, 라오스, 몽골, 미얀마, 네팔, 케냐에 지부를 개설했고 2천3백여곳의 우물을 만들어 생명의 식수를 공급하고 60여곳의 초중고를 건립해 인재들을 길러냈습니다.

스님은 너와 나, 세상이 하나라는 불이정신을 바탕으로 스님은 지구촌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한국 불교의 자비 정신을 전했습니다.

스님의 생전 육성을 들어보겠습니다.

태공당 월주 대종사(2019년 1월)  

[“도와준 나라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네팔, 케냐, 여러 나라를 도와주고 있는데 도와준 나라마다 나라가 잘되면 도와주는 지구촌공생회 입장에서는 즐겁기가 짝이 없습니다.”]

질문 6.이제는 스님의 가르침을 후학들이 잘 이어받아 한국 불교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아야하지 않겠습니까 ?

답변 6.스님은 코로나19가 오기 전인 2019년까지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캄보디아 현지를 직접 방문해 학교와 유치원을 지어주고, 지난 2020년에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헌신하는 의료진을 위해 7300만원의 후원금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월주스님은 평생동안 “앉아서 성불할 수 없고, 진리는 세간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스님의 정신을 잘 계승해 한국 불교가 다시 일어서는 발판을 마련해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전경윤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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