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때는 수험생이었다” 큰 아이가 고3인 올해 집에서 한 번도 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춘기 때보다 훨씬 더한 아이의 짜증과 그것을 묵묵히 받아주고는 내게 앙갚음을 하는 아내 앞에서 목구멍 까지 차올랐지만 한번도 내뱉지 못했다. 더군다나 요즘은 수능시험일이 100일 밖에 남지 않은 더없이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조부모 재력과 엄마 정보력, 아빠 무관심’이 자녀 합격 3대 조건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몸소 실천이라도 하듯 그간 나는 아이 입시 성공을 위해 딱히 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관심 마저 당당하게 만드는 ‘풍족한 물밑 지원’은 언감생심일 뿐. 재깍재깍 다가오는 수능 시계만 멍하니 쳐다보곤 했던 내게 D-100일을 기점으로 가정사를 도울 일이 몇가지 생겼다.

  우선 아이 합격을 위한다는 이유로 잠시 일을 쉬고 있는 아내를 독려해 집 근처 사찰에서 ‘수능 100일 기도’에 동참하도록 했다. 조계사 근처 인사동에서 아내가 편히 절을 하게끔 개량한복 같은 법복도 사줬다. 그런데 수능 100일 기도가 시작된 26일을 즈음해 코로나19가 악화되면서 온 나라에 비상이 걸렸다. 100일 기도 나흘만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3단계에 준한 강화된 조치'로 격상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사찰은 출입 인원을 제한하면서 간신히 법당을 열긴 하지만 당분간 ‘온라인 수업’ 처럼 집에서 기도를 해야 할지 고민이 생겼다. 30여 년 전 내가 고3 수험생이었을 때 대구 팔공산 꼭대기 갓바위로 향하곤 했던 연세 드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당시 어머니가 쏟은 정성의 10분의 1도 되지 않을 법한 내 기도가 갖는 무게는 얼마만큼 일까? “누구나 한 때는 수험생이었다”는 말보다 “수험생 학부모 아무나 못한다”는 말을 더 절감하는 요즘이다.

  수능 D-100일 즈음한 주말 나는 그럴듯한 수험생 공부방을 만들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큰 아이는 오래 전부터 집에서는 집중이 안된다며 독서실과 스터디카페를 전전해왔다. 그래서 원래 큰 아이가 쓰던 방을 차지해 작업실인양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왔는데 이제 고스란히 넘겨줘야할 상황을 맞았다. 코로나 2.5 단계로 독서실과 스터디카페에 집합금지 명령이 내려져 우리 애 갈 곳도 마땅찮아졌다. 방 정리를 마친 뒤 관련 뉴스 댓글을 보며 '아빠의 로망' 서재를 잃어버린 울분을 삭혔다. '공감'이나 '좋아요'가 많은 댓글이 보였다. “급식도 먹고 밀집도도 더 높은 학교는 안전하고, 대화도 하지 않는 스터디카페를 막는 것은 실상을 모르는 결정이다 (susi****)” “교육부는 왜 이렇게 무능한지, 생각이 없는건가 고3은 학교에서 자습밖에 안한다고! (hiju****)” 수업시간이면 몰래 다른 과목을 공부하거나 자습을 했다는 큰 아이는 이번 거리두기 조치로 더 불안해했다. “가뜩이나 올해는 대학교 휴교 사태로 재수생이 급증할 것 같은데, 고3 현역들은 점점 더  불리해지는 같아요”라고 토로했다.

   사실상 유일한 나의 수험생 지원책인 ‘운전 기사’ 역할은 당분간 쉬게 됐다. 주말이면 아침에 데려다주고, 밤에 다시 태우러 다닌 대치동 학원들이 문을 닫았다. 입시 상담을 해주고 잠자는 원생도 깨워주는 ‘관리형 스터디카페’ 앞에서 밤 12시 맞춰 자가용을 대기하는 번거로움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는 학원 가는 대신 과목별 ‘과외 선생님’을 집으로 모실 수 밖에 없어 사교육비는 더 들어가게 생겼다. 불안한 마음에 걱정이 겹친다. "언제까지 이 상황이 계속될지 알 수 없어 포항 지진으로 수능이 연기된 작년보다 수험생 혼란이 더 심각합니다" 한 입시학원 관계자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돈다./경제산업부 이현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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